사람과 사람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앞장서는 서울대교구 박선용 신부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2-10-25 수정일 2022-10-25 발행일 2022-10-30 제 3316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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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신앙 열매의 중요성 깨닫게 하는 모델”
한국교회 초대 교구장이기에
모든 교구의 기도와 협력 필요

박선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오늘의 신자들에게 신앙적 모범과 귀감이 되는 분”이라고 말한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소(蘇)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비록 사목지인 조선에 들어오시지는 못했지만, 조선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던 발걸음은 곧 하느님을 향한 상징적인 여정이었습니다. 오늘의 신자들에게 신앙적 모범과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 부위원장 박선용(요셉)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 시복 당위성과 필요성을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교회에 남긴 신앙적 열정과 모범에서 찾았다.

서울대교구는 10월 10~13일 열린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주교단으로부터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을 교구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것에 동의를 얻었다. 박 신부는 이와 관련해 “한국교회는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해 왔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의 자체적인 시복 추진을 위해 주교단 동의를 얻는 절차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박 신부는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B. A. Cappellari) 추기경이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조선 전교를 맡아 달라는 서한을 보내자 파리 외방 전교회는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하고 조선 입국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답변을 보냈다”며 “이 상황에서 조선 전교를 자원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브뤼기에르 주교”라고 강조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를 신설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사목지인 조선을 향해 페낭을 떠나 싱가포르, 마카오, 서만자 등을 거쳐 1835년 10월 19일 마가자(馬架子)라고 불리던 교우촌에 도착해 조선 입국이 가까워졌지만 이튿날 프랑스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짖고는 선종하고 말았다. 향년 43세였다.

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일상을 충실히 살며 맺는 열매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모델이 되고 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울러 “서울대교구가 시복을 추진하지만 서울대교구는 조선대목구를 계승하는 교구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고,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한국교회의 초대 교구장이신 분이어서 모든 교구가 함께 기도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여건에 대해서는 “염수의 신부(요셉·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님이 주도해서 개포동본당이 자료들을 축적해 놓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도 연구물들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해 서울대목구 라리보 주교 등의 노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가 그해 9월 24일 서울에 도착한 후, 10월 15일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뮈텔 주교 일기」 1931년 10월 15일자)됐기 때문에 시복 추진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