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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9)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최양업의 이야기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10-12 수정일 2022-10-12 발행일 2022-10-16 제 331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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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은 목자”
신학생 최양업 우수함 서한 통해 드러나
활동·선종·시신 이장에 관한 기록 남겨
사목순방 중 겪은 어려움 생생히 전해
최양업 선종 소식에 깊은 상실감 토로

안동교구 진안성지는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위해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한 곳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최양업이 신학공부를 하고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스승이자 동료로 최양업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국적은 달랐으나 조선의 복음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했던 이들의 관계는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다. 신학생 최양업, 부제 최양업, 사제 최양업의 여정을 가족과도 같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 신학생 최양업,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모방 신부를 비롯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대표였던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 등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최양업에 대한 이야기를 서한을 통해 전했다. 1843년부터 1849년까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메스트르 신부는 최양업의 스승 역할을 하면서 그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서한에 기록했으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도 조선교회의 장상으로서 최양업 신부의 활동과 근황을 서한에 적어 보고했다. 동료 선교사인 페롱과 푸르티에 신부는 최양업의 활동과 고난, 선종과 시신 이장 등에 관한 기록들을 남기기도 했다.

모방 신부가 파리 신학교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6년 4월 4일자 서한에는 신학생 최양업이 처음 언급된다. “교우들은 제가 약간의 소년들을 공부시키고자 하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제일 처음에 도착한 소년은 최 토마스 양업이라고 하고 다음은 프란치스코 과추리(최방제의 아명)라고 합니다… 이들이 훌륭한 방인 사제들이 된다면 박해 때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해 12월 3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 모방 신부는 “이 소년들은 온순하며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마카오 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 역시 “금년에 모방 신부가 나에게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1837년 10월 6일자 서한)고 전하는가 하면 페레올 주교도 “두 명의 조선인 신학생(김대건과 최양업)이 저희와 함께 있는데 매우 경건하고 배운 것이 많다”(1843년 3월 5일자 서한)고 밝혔다.

■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길 위에 선 최양업

서양 선교사들이 가기 어려운 험준한 오지를 찾아다닌 최양업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간간히 최양업의 소식을 듣게 된 서양 선교사들은 그의 고난과 어려움을 서한을 통해 전하고 있다.

푸르티에 신부는 두 통의 서한에서 최양업을 이같이 언급했다.

“토마스 신부가 한번은 외교인들에게 잡힐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는 매우 다행히도 그가 있던 집의 울타리에 나 있던 구멍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1857년 10월 2일자 서한).

“우리 조선인 신부(즉 최양업)는 급습을 당하고 잡힐 뻔하였습니다. 그의 교우들은 괴롭힘을 당하고 매를 맞고 옷이 찢겼습니다. 신부 자신도 모욕을 당하고 협박을 받았습니다.”(1859년 10월 1일자 서한)

정체가 발각되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최양업의 사목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는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 태생인 토마스 신부님마저도 해마다(맡은 지역의 사목순방을) 매우 힘들게 기어다니다시피 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기진맥진할 우려가 있다”(1852년 9월 20일자 서한)고 전했으며, 베르뇌 주교는 파리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최양업 신부가 한해에만 4500명의 고해성사를 들었다”며 “신부 두 명을 보내 달라”(1855년 1월 22일자 서한)고 청했다.

■ 최양업의 죽음을 슬퍼하며 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메시지

조선에서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던 최양업의 죽음은 동료 선교사들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그리고 최양업과 가까웠던 페롱 신부는 서한을 통해 그 상실감을 토로했다.

“최 토마스 신부가 길지 않은 투병 끝에 6월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의 상실감은 너무나 컸습니다. 토마스 신부는 착한 마음씨와 굳건한 신앙심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기에 서양인이나 조선인들 모두에게서 애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선교지 전체에 슬픔을 안겨 줬습니다.”(1861년 8월 22일 베르뇌 주교가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서한)

“그 무엇으로도 이 상실감을 너에게 표현할 수 없구나, 이 상실감을 이해하려면 그가 조선대목구에 바친 수많은 봉사와 그가 조선교회에 가져다 준 모든 이익을 봤어야만 한다. 그 말은 즉,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는 확실히 가장 대체하기 힘든 인물이었다는 것이지. 그러니 우리의 애도와 애석함이 얼마나 클지 짐작해 보아라.”(1861년 9월 다블뤼 주교가 남동생에게 보낸 서한)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를 불렀던 최양업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들은 페롱 신부. 가족과도 같았던 벗을 잃은 페롱 신부의 애통함도 편지에 담겼다.

“토마스 신부는 제게 어떤 동료 신부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제가 그를 존경하는 만큼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잃음으로써 매우 훌륭하고 충실한 친구를 잃었습니다.”(1861년 7월 26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