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1)우주론적 상상 – 두 번째 이야기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8-16 수정일 2022-08-16 발행일 2022-08-21 제 3307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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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우주가 연결돼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소우주’이다
전통 신학이 철학 도움 받았듯
오늘날 신학은 ‘과학’ 도움 필요
우주에서 인간은 보잘것없지만
인간에 우주 역사 새겨져 있어

미국 항공우주국의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으로 포착한 ‘스테판의 오중주’(Stephan’s Quintet). 출처 미국 항공우주국 홈페이지

■ 철학적인 사진

사진 보기를 즐겨한다.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영상이 소설이라면, 사진은 시 같다. 때때로 한 장의 사진이 한 권의 책보다 더 많은 질문과 정념을 포함하기도 한다.

지난 7월 12일에 공개된,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천체물리학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우주의 광활함을 시각적으로 확인한다. 사진 안에 있는 어떤 은하는 131억 년 전에 탄생하고 지구로부터 46억 광년 떨어져 있다고 한다. 138억 년이라는 우주의 나이보다 우주의 공간적 크기는 몇 배나 더 긴 광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우주의 시간적 길이와 공간적 거리는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한다. 자연과학에 무지한 나는, 과학적 이해보다 철학적 상상을 할 뿐이다. 그 장대한 우주 속에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와 먼지보다 작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생각한다.

우주를 촬영한 사진들은 철학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저 광대한 우주의 시작과 기원은 무엇일까? 저토록 엄청난 우주 공간 속에 생명체가 없을까? 만일 생명체가 없다면 지독한 공간 낭비가 아닌가?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여전히 숱한 별들이 탄생하고 소멸하고 있다는 데, 지구라는 별 역시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 아닌가? 인간을 소우주이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는 것은 과대망상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마틴 리스) 우리 인간은 우주의 압도적인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넓이 속에서 보잘것없는 한 톨 먼지의 시공간을 점유하고 살아간다.

■ 우주에 대한 신학적 질문 1 - 창조론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우주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신앙적 진리를 우리는 믿고 고백한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 발생에 관한 과학적 설명과 해설이 아니다.

창조에 대한 교리와 신학적 담론은 창조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이해를 반영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에서 생겨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 자연계 전체, 인간의 모든 역사는 이 원초적 사건에 근거한다. 이 기원에서 세계가 형성되고 시간이 시작되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38항) 우주에 대한 창조 교리와 창조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셨다(creation ex nihilo)는 것이다. 우주 창조에 관한 많은 교리적 진술과 신학적 언술은 인간 지성과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포함한다. 사실, 교리와 신학은 당대의 학문적 성과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진술들을 새롭게 가다듬어가야 한다. 전통적인 신학이 철학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담론을 구성했다면 오늘의 신학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신학보다 자연과학이 더 많은 설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주에 관한 질문은 창조주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질문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 우주에 대한 신학적 질문 2 – 종말론

우주는 무한히 팽창하는가? 우주의 시작이 있다면 우주의 종말도 있지 않을까? 우주망원경과 입자 충돌기 덕분에 우주의 끝에 대한 탐구 역시 활발해지고 있다고 한다. 빅 바운스, 빅 립, 빅 크런치, 열 죽음, 이 모두 우주의 팽창과 소멸, 우주의 끝에 대한 이론들이다.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소멸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영원 자체는 방정식을 초월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분석 결과에 의하면 우주도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행성과 별, 태양계, 은하, 블랙홀에서 소용돌이치는 성운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미지의 거친 먼 미래에는 태양이 팽창하고, 지구는 소멸하며, 우주 자체도 마침내 종말을 맞을 것이다.”(케이티 맥 「우주는 계속되지 않는다」)

언젠가 지구는 소멸해도 우주는 여전히 시간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라는 상상에 막막해진다. 인간 개체의 죽음과 지구의 죽음과 우주의 죽음 사이에는 수백억 년의 시간이 더 남아있을 것이다. 이 시간의 거리는 우리를 아득하게 한다. 우주의 크기와 종말을 상상하면, 비관과 허무의 정조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종말을 이야기할 때, 영원과 희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일까? 영원은 시간의 간격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원 속에서 다시 재편되고 재구성된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42~1050항) 인간과 우주, 모든 피조물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에 각자의 방식에 따라 참여하여 그 고유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완성하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 즉 그 종말론적 완성을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

■ 우주 안에서 인간의 운명 – 실존적 질문

우리는 우주의 주인공이라기보다 그저 자기 삶의 주인공일 뿐이다. 아름답고, 경이롭고, 수수께끼 같은 우주 앞에서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특이점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우주’이다. 근대철학의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는 물질적이고 우주적인 연대의 의미로서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빅뱅과 별과 물질의 순환을 통해 이루어진 전 우주의 장엄한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러니 만약 하늘의 별에 관해 알기 원한다면 저 하늘을 보기 전에 먼저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당신은 우주 역사의 체현이다.”(윤성철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

우리는 질문하고 배우고 사고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올리버 색스) 비인격적 자연법칙 속에서 궁극의 해답을 찾지 못한다. 과학은 우주의 현상을 이해하는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우주 가운데서 인간의 의미는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이 가진, 인문적이고 신학적인 질문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주의 현상들이 제기하는 도전 속에서 우리의 운명과 우리 생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의 교회와 신학은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