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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0)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보낸 열다섯 번째 서한①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7-26 수정일 2022-07-26 발행일 2022-07-31 제 330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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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많은 사제를 보내주십시오”
최양업과 함께 사목했던 6명의 선교사
과중한 업무로 건강 악화돼 목숨 잃기도
잠시 천주교 정책 온건해지는듯 했으나
박해령 존속되며 교우들 괴롭힘 당해

1864년 조선 해외선교 사제로 파견되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 4명의 모습을 담은 샤를 드 쿠베르탱의 ‘선교사들의 출발’.(1868년 작) 왼쪽부터 위앵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이들 4명은 모두 병인박해로 순교, 성인 반열에 올랐다.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순방을 시작한 최양업은 경기도·충청도·강원도·전라도·경상도 등 5개 도를 오가며 신자들과 만났다. 조선에서 사목하는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기에 가장 척박한 지역으로 쉬지 않고 순방에 나섰을 최양업. 사목순방을 시작한지 8년이 지났을 무렵, 숨을 돌리고 여유를 부릴 법도 하지만 신자들에게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1858년 10월 3일 전라도 완주 오두재에서 보낸 열다섯 번째 서한에는 열성적으로 기도하고 교리공부를 하는 신자들을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또한 신자들을 위해 훌륭한 선교사 신부님을 보내 달라고 청하는 글도 함께 실고 있다. 여전히 그의 삶은 신앙, 그리고 신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 연이은 서양 선교사들의 죽음, 큰 슬픔으로 다가오다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학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열다섯 번째 편지에 최양업은 조선에서 사목하는 서양 선교사들의 근황과 선교사 신부를 많이 보내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페롱 신부와 ‘단짝’이라고 소개한 최양업은 “페롱 신부님은 지금 건강하게 잘 있으며 신자들한테 사랑도 아주 많이 받고 있습니다”라고 전하는가 하면, “조선으로 배정된 선교사 신부님들에게 사천대목구 시노드 회의록을 한 권씩 주시고, 특히 회의록 제10장과 부록 14조부터 끝까지 잘 읽게 해주십시오”라고 당부한다.

1857년 성직자 회의에서는 사천대목구 지도서를 조선에서도 따르기로 결의했는데, 이 지도서의 제10장에는 신자들에 대한 선교사의 행동지침이, 부록에는 여자들에 대한 선교사의 행동지침이 실려 있다. 조선에서 많은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해온 최양업은 앞으로 조선에 파견될 서양 선교사들이 보다 빨리 정착해 사목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그르레즈와 신부에게 제안한 것이다. 또한 “훌륭한 선교사 신부님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조선에 많이 보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1852~1857년 무렵, 최양업과 함께 사목했던 서양 선교사는 6명 가량이다. 1854년 6월 18일에 선종한 장수 신부, 1857년 12월 20일 선종한 메스트르 신부를 제외하면, 1858년에는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페롱 신부가 최양업과 함께 사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목순방을 이어갔기에 몇몇 서양선교사들은 건강을 챙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최양업은 서한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메스트르 신부에 대한 슬픔을 토로한다. “그분이 우리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참고 온갖 고초를 겪으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그분의 인내심과 양순한 성격 때문에 그분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런즉 신부님께서는 저와 모든 신자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7년 전 과중한 업무와 과로로 선종한 페레올 주교, 조선에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선종한 장수 신부,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까지 서양 선교사들의 연이은 죽음은 최양업에게 큰 슬픔이었다. 또한 베르뇌 주교 역시 과로로 건강이 악화돼 최양업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원컨대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무수한 죄과를 불쌍히 여기시어 지극히 좋으시고 조심성이 많으신 우리 주교님을 장수케 하시며 덕화가 날로 융성케 해주시기를 빕니다. 만일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신다면 어떠한 재난으로든 벌하시더라도 우리 목자만은 앗아가지 마시기를 빕니다.”

■ 조선의 천주교 정책, 온건해지다

1858년 당시 조선은 큰 흉년이 들었다. 20푼이었던 쌀 한 말은 120푼, 즉 6배 가량 가격이 올랐고 먹고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조선의 개혁을 희망했다. “머지않아 서양 함선들이 쳐들어와서 조선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전국적으로 돌아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 함선들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조선은 이 상태로 지탱될 수 없고 자멸할 것이다. 차라리 서양 함선들이 빨리 와 더 좋은 상태로 철저하게 개혁될 필요가 있다. 우리 조정을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이 훨씬 낫다.’”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조선 밖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베르뇌 주교는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57년 11월 17일자 서한에서 “현재로서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천주교에 호의적이며 관리들은 최근 회의에서 왕국 전체가 그리스도교화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고 적었으며, 최양업도 “현 정권을 잡은 대신들은 안동 김씨 집안인데, 이들은 신자들에게 지나친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전한다. 조선의 천주교 정책이 온건해졌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박해령은 여전히 존재했고, 관원들이 교우들을 괴롭히거나 재물을 빼앗는 일도 줄곧 발생했다.

최양업은 당시 천주교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도 모든 세속적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가 올 때까지 망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 그러나 박해의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모든 난관을 극복해 용맹하고 굳세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