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기후변화와 유럽의 폭염 / 고계연

고계연 베드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입력일 2022-07-26 수정일 2022-07-26 발행일 2022-07-31 제 330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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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찜통더위에 웃통을 벗은 채 광장 분수대에서 머리를 감는 남자, 바싹 마른 누런 벌판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맹렬한 들불, 산림을 잿더미로 삼키고 민가를 위협하는 산불,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로, 적색 폭염 경보와 국가비상사태 선포…. 기후변화가 빚어내는 7월 유럽은 지옥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달 들어 유럽은 한여름 이상고온으로 초비상이다. 폭염은 연일 신기록을 쓰며 이젠 섭씨 40도를 넘는 게 예삿일이다. 영국이 사상 첫 40도를 넘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사정이 더 심각해서 무려 47도에 육박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경우 50도를 넘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전망엔 아연실색하게 된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 지구촌이 유례없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가 사람을 죽이고,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을 죽이고 있다”는 지적이 피부에 와 닿는다.

40도를 넘나드는 고온은 사람의 정상 체온 37도 내외와 비교하면 참기 힘들다. 말 그대로 숨이 턱턱 막히는 수준이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수년 후엔 “그래도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지독한 악순환이 지구촌 앞에 도사리고 있다.

왜 폭염 사태가 올해 유독 유럽을 강타하고 있을까? 우선 ‘블로킹 현상’이 폭염의 원인으로 꼽힌다. 거대한 고기압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대기 흐름을 정체시키기 때문이다. 공기 흐름을 완전히 막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게다가 뜨거워진 고기압층을 밀어내는 제트기류 힘의 약화도 한몫했다. 온실가스와 기후변화 발(發) 지구의 경고인 셈이다.

유럽과 달리 우리는 ‘폭염과 열대야가 벌써 끝났나’ 싶을 정도다. 밤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창문을 열면 제법 시원하다. 우리는 유럽보다 사정이 좋은 걸까. 안도 속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도 좋을까. 절대 아니다. 기온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기서 거기다. 유럽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후위기는 집단행동이냐 집단자살이냐 갈림길에 있다.” 최근 독일에서 열린 기후회담에서 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경고가 섬뜩하다. 당장 지구촌이 함께 기후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기후위기에 맞서 과학자들이 내놓은 대응책이 바로 ‘지구 기온 변화 1.5℃ 이내’ 시나리오다.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폭을 1.5℃로 제한하자는 것이다. 기준은 산업화 이전 대비다. 이미 1℃ 정도 올랐으니 0.5℃의 여유밖에 없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0년보다 최소 45% 줄이고, 2050년에는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구온난화를 그나마 늦추는 유일하고 절박한 해법으로 꼽힌다. 그밖에 생물다양성 보존, 내연기관차 감축, 석탄 등 화석연료 덜 쓰기 등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위기로 치닫는 기후 문제의 해법은 결국 지구를 보호하는데 달려 있다. 지구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하늘과 땅”(창세 1,1)이 아닌가.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설파한 대로 ‘우리 모두의 집’이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은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이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 위기에 당면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이 집을 돌보는데 일치해야 한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중) 지구를 지키는 일에서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버리자. 당장은 아니더라도 후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수수방관할 순 없지 않은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부터 기꺼이 나서자.

고계연 베드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