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하)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2-06-28 수정일 2022-06-28 발행일 2022-07-03 제 330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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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영성 따라 돌봄·모금에 헌신

2018년 8월 평화의 모후원에서 쟌 쥬강 성인 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는 1971년 한국에 진출, 1990년에는 수원에 ‘평화의 모후원’을 세우고 “가난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라 말했던 창립자 쟌 쥬강 성인의 영성을 따라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1879년 쟌 쥬강 성인이 8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2400여 명의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프랑스, 영국, 벨기에, 스페인, 아일랜드, 미국, 북부아프리카, 이탈리아, 몰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82년에는 인도를 시작으로 아시아에 진출했지만, 수도회와 한국과의 인연은 그보다 80여 년 뒤다.

1963년 수도회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고(故)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의 요청으로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방문 당시 수원교구장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도 수원교구에 수도회 진출을 요청했다. 마침내 1971년 푸른 눈의 수녀 2명이 파견되면서 한국에 진출했다.

처음 청주교구에 양로원을 세우고 자리를 잡은 수도회는 1990년 두 번째 양로원인 ‘평화의 모후원’을 수원에 마련했다. 평화의 모후원은 양로원과 수녀원, 그리고 수녀들의 수련소를 겸비한 장소다. 평화의 모후원에 설립된 수련소는 세계에서도 10번째로 마련된 수련소다. 한국 진출은 수도회가 설립된 지 100여 년 후에 이뤄졌지만, 한국분원의 성장이 괄목할 만큼 컸던 것이다.

수녀들의 소임은 주방, 식당, 빨래방 등 다양하지만, 노인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만큼은 공통적인 소임으로 삼고 있다. 수녀들은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1974년 첫 양로원을 개원했을 때는 엘리베이터와 난방시설, 수세식 실내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가난한 노인이 살기에 사치스럽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수녀들은 ‘친부모라면 이 정도 대접은 당연했을 것’이라 여겼고,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지켜나갔다.

이런 어르신 봉양은 모두 수녀들의 모금 활동으로 이뤄졌다. 수도회는 쟌 쥬강 성인의 가르침대로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사업을 운영하지 않는다. 모금 활동 중 수녀들이 냉대를 받기도 하고 쫓겨나는 일까지도 있었지만, 수녀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면서 모금에 나섰다. 수녀들은 모금 중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어르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려왔다. 이런 수녀들의 활동에 감화된 냉담 교우 가정이 회두하기도 하고, 고속버스회사가 2년 동안 모금을 나서는 수녀들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도 있었다.

수녀들이 어르신 돌봄과 모금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힘은 기도에서 온다. 특별히 수도회는 공동체가 함께하는 기도를 중요시한다. 낮기도 외에 다른 모든 시간전례를 공동체 기도로 바친다. 모든 식사 시간도 영적 독서를 낭독하는 가운데 침묵 중에 이뤄진다. 하루 종일 수십 명의 어르신을 모시는 바쁜 일과를 보내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별도의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