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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5)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6-15 수정일 2022-06-15 발행일 2022-06-19 제 329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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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도움이 되는 ‘열린 교회’로 살아가고자

교구뿐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 방안 고민
전문대학·문화회관·다미안의원 등 설립
유교 관계자들과도 소통하며 화합 이뤄
농민 사목에 진력… 추방 위기 겪기도

안동교구는 가난한 농촌교구였지만 ‘서로 나누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교회’를 일구며 꾸준히 성장해왔다. 사진은 1987년 두봉 주교와 안동 동부동본당 주일학교 학생들이 환담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0년만 하겠다고 다짐했던 교구장직을 20년 넘게 맡게 됐죠. 새로 설립된 작은 교구의 교구장을 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고생이 많았겠다’, ‘어려웠겠다’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뭐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작은 교구니까 더 편한 것도 있었죠.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적지 않습니까.(웃음)

안동교구 교구장을 맡고 나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구뿐 아니라 지역사회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전문대학도 만들게 됐죠. 교구장이 된 그해였는데요. 파리외방전교회 초청으로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룩셈부르크관구에서 파견된 수녀님들은 일반 고등학교를 세워서 운영하길 원하셨는데요, 안동에는 이미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는 중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새로 생긴 전문학교 제도에 관해 수녀님들과 의논을 했고, 수녀님들은 학생들이 졸업 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는 교과 과정을 만들어주셨죠.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로 처음 시작해 상지실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된 지금의 가톨릭상지대학교입니다.

안동 문화회관을 설립한 것도 지역민들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안동에는 시민들이 모이고 문화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큰 강당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화회관을 만들어서 주일에는 신자들을 위해 쓰고 평일에는 지역주민뿐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운영했어요. 문화회관에선 음악회 등을 비롯해 특별히 영화상영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사실 그 문화회관을 짓는데 가장 반대했던 이들이 신부님들이었는데요. 결과적으로는, 힘겨웠지만 그렇게 씨앗을 뿌렸던 것은 매우 잘 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학생회관도 만들었는데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또 생계를 위해 낮엔 일을 하는 아이들을 위한 야간학교 등을 여는 공간이었습니다. 저희 교구 관할에 가장 많이 사시는 분들이 바로 농민들이기에, 그들의 교육과 활동 등의 중심이 되는 농민회관도 만들었고요. 다미안의원은 한때 숫자가 꽤 많았지만 사회에서 소외되고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세운 병원이었습니다.

두봉 주교가 안동교구장 시절 설립한 안동문화회관 전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다른 지역도 아니고 유교, 유학의 뿌리가 여전히 강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가톨릭교회가 성장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데요. 안동 지역민들은 가톨릭신자가 아닌 이들도 대부분 교회에 대해 다들 좋게 생각해주십니다. 그래도 안동은 한국 유교문화의 본고장 아닙니까? 그런데 저희 교구는 유교 관계자들과도 잘 지냈어요.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지금 돌이켜봐도, 주님의 선하심과 배려로 마련해주신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유한상(베드로) 전 안동문화원장님, 지난해에 돌아가셨는데요. 그분은 다들 ‘영남의 어른’, ‘안동의 문화 예술 민속의 전설’이라고들 불렀습니다. 명맥이 끊겼던 하회탈별신굿을 복원해 전승하시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만드신 분이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안동교구 설정과 발전에 헌신하셨을 뿐 아니라 안동문화회관 초대관장을 맡아 그 초석도 단단히 놓아주셨습니다. 가톨릭상지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외국인 수녀님들과 함께 터를 보러 다닐 때에도 원장님께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발로 뛰어다녀 주셨습니다. 가톨릭상지대학교 이사로도 수십 년간 재직하면서 헌신해주셨고요. 그분은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유교의 전통과 가치를 더욱 잘 지킬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교는 하느님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양심대로 바르게 사는, 참 인간답게 살자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가치이지요.

저희 교구는 사목의 여러 분야 중에서는 농민사목에 가장 노력했습니다. 대부분의 교구민들이 농민이었고, 농촌 지역 교구이고요. 그런데 1979년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 일로 저는 한국에서 추방당할 뻔 했습니다. 1978년 영양군이 농가소득에 좋다면서 감자재배를 권장했는데요, 불량종자를 배급한 겁니다. 농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당국은 듣지 않다가 가톨릭농민회가 적극 나서고 교구 사제들이 피해 현장에 직접 가서 조사를 돕고 투쟁을 전개하면서 보상을 받았는데요. 그 활동에 앞장섰던 안동가톨릭농민회 오원춘 분회장이 납치, 폭행을 당한 겁니다. 저희 교구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실을 파헤쳤으며 그 실태를 알리는 문건도 배포하고 전국적인 기도회를 펼쳤습니다. 첫 기도회는 김수환 추기경님도 참례한 가운데 안동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열었고요.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시위로 교구 신부님들이 여러 명 구속됐죠. 그리고 당시 유신정권은 항의를 이어간 저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 겁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