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6)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5-31 수정일 2022-05-31 발행일 2022-06-05 제 3297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신앙은 인격 통해 전수… 사제는 온 삶으로 복음 증거해야
열정과 역동성의 삶 잃어버리고
정주와 타성의 삶 살면 안 돼
자신의 신념·태도와 생활양식을
복음의 방식으로 새롭게 하길

지난해 12월 3일 수원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사제서품 미사 중 수품자들이 제대 앞에 엎드려 기도를 바치고 있다. 신앙은 인격을 통해 전수되며, 사제는 온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피정 풍경

어느 교구 사제 피정에 와 있다. 타 교구 신부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즐거움도 크다. 교구를 넘어 사제라는 동질성이 주는 편안함과 친밀성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더욱이, 이해관계와 인정 욕망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할 조건도 성립되지 않으니 조금은 스스럼없이 정직하게 강의하고 대화할 수 있다. 같은 교구 사제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교구의 경계를 넘어 다른 동료 사제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지내는 일은 중요하다. 몸이 거하는 공간이 좁으면 마음도 좁아진다. 몸과 마음의 반경을 확장할 필요가 항상 있다.

피정 중에는 사제들이 번갈아 가며 미사 주례를 하고 강론을 한다. 동료 신부의 강론을 듣는 일은 즐겁다. 다양한 관점과 스타일의 강론을 접할 수 있다. 피정 시간 중에 하는 강론은 신자들을 향한 강론이 아니다. 사제로서 묵상과 성찰을 동료와 나누는 일이다. 사제로서의 경험이 녹아 있는, 또 정직한 자기 고백의 강론은 그 자체로서 동료 사제에게 일종의 힐링이 된다. 오늘 미사 때 들은 어느 사제의 강론이 특히 그랬다. 30년이 넘는 사제 생활을 하며 느꼈던 고민과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실, 모든 정직한 자기 고백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울림이 있다. 그것은 자기 고백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과 또 외적 성취와 업적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저 자기 삶에 대한 정직한 성찰과 고백만으로도 충분하다. 정직한 성찰과 자기 고백의 행위 그 자체가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직한 자기 고백은 듣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자기 삶을 정직하게 성찰해보라는 겸손한 권유이며 대화다.

■ 사제의 자기 질문과 점검

사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점검해야 한다. 교리와 신학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해서 신앙이 깊은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업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신앙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사와 전례를 매일 거행한다고 해서 개별적 신앙과 인격이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성사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은총이 충만해짐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사제의 개별적인 신앙과 인격의 성숙은 성사의 인효성 영역에 더 많이 좌우된다. 즉, 성사의 목적과 지향을 기억하면서 성사 거행에 쏟는 사제 자신의 집중과 정성에 달려있다는 의미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며 재현하는 일이다. 사제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재현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생각(시선과 관점)과 행동과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가 무엇을 선포하고 실현하려고 했는지, 그가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는지, 그가 어떤 행위들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현실의 사제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점검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그저 종교적 직무수행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제 생활 역시 부부 생활과 비슷하다. 초기에는 하느님이라는 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만 들어도 설렜다. 하지만 진실한 말과 속내 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그저 몸만 함께 살아가는, 권태기의 부부처럼 사제도 자칫 종교적 관행으로만 살아갈 위험이 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몸과 마음으로 관계하고 대화하고 있는지 늘 성찰할 일이다.

사제, 신부, 성직자, 사목자, 저마다의 역할적 특성을 드러내는 호칭이다. 성사와 전례를 집전하는 제사장, 영적 지도자, 종교적 직무의 수행자, 신자들을 돌보는 사람. 신학적, 영성적, 종교적, 수행적 관점에서 정체성을 표현하는 명칭이다. 이 넷 가운데 신자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가장 강조해야 할 역할은 사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사목의 행위는 통치와 지배와 관리의 행위라기보다는 봉사와 헌신과 섬김의 행위다. 근원적 의미에서 사목자로서 사제는 지도자의 모습보다는 종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하느님 백성의 근본적 모습은 서로 섬기는 사람, 즉 종의 모습이다. 교황에 대한 명칭 역시 ‘모든 종들의 종’이다. 사제가 자신의 사목자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실천하며 살아갈 때, ‘자신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는 존재’라는 그리스도교 사제직의 본래적 의미를 더 잘 실현하게 될 것이다.

■ 교계 제도와 성직자 문화

사제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제들이 선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사제직을 지향할 때 가졌던 그 선의와 원의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양한 삶의 사정과 사연 속에서 사제들이 가졌던 그 첫 마음과 지향들이 참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처음의 선의와 원의와 지향들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점점 타성 속에서 관성화되어가는 모습을 또한 발견한다. 무엇이 우리들의 그 선의와 지향들을 퇴색시켜버린 것일까.

교계 제도는 복음 선포라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택한 가시적 존재 방식이다. 모든 제도는 목적론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제도가 갖는 원래의 목적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쇄신시켜 나가지 않으면 모든 제도는 퇴색하고 변질될 위험이 있다.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한 제도라는 원래의 목적과 지향이 퇴색되고 위계적 서열 구조로 오해되고 변질되기도 한다. 위계적 서열 구조와 문화 속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사제들은 형제적 평등성과 창의력을 상실하고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방식으로 살아갈 위험이 있다. 사랑과 섬김이라는 신앙과 복음의 방식으로 살기보다는 권력과 힘의 논리를 추종하며 살아갈 위험이 있다. 열정과 역동성의 삶보다 정주와 타성의 삶을 살아갈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수직과 명령의 문화는 형제적 협력의 문화를 낯설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의 존재 방식과 생활방식으로 시노달리타스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 “새로운 신념, 자세, 생활양식”(「찬미받으소서」 202항)

피정 중 한 사제가 고백했다. 사제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과 교회와 세상의 복음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교회 제도의 구조적 한계와 거대한 세상의 물결이 자신을 무기력하게 하고 좌절케 한다고 말이다. 사실, 하늘 아래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도 사제는 직무가 주는 힘 덕분에 적은 노력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조금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맙고 미안한 일이다. 사제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신념과 태도와 생활양식을 복음과 신앙의 방식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신앙은 무엇보다 인격을 통해 전수된다. 사제는 말과 행동과 태도로, 즉 온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