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명예기자 단상] 부르심, 그것은 사랑이었네

박신희 베아트리체 명예기자
입력일 2022-05-24 수정일 2022-05-24 발행일 2022-05-29 제 329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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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봄날, 책장을 정리했다. 나란히 줄을 맞춘 수첩 10권. 매해 3월이면 신부님께서 전해주시던 교사수첩이다. 나는 11년차 주일학교 교사다.

10년의 시간은, 어린이부를 졸업한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선생님, 저 술 한잔 사 주세요” 하게 되는 시간이고, 나를 “떤때님”이라고 부르던 아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특히 어린이부를 졸업하고 청소년부로 간 아이들은 마주칠 때마다 크는 것이 보이는 듯 빠르게 성장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과 가끔 성당에서 마주치면 몇 개월 사이에도 아이들은 쑥쑥 커 있었다.

“라파엘, 언제 또 이렇게 큰 거야? 볼 때마다 크네”라는 나의 인사에, 라파엘이 “선생님이 안 크시는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래, 아이들이 커가는 것에만 기뻐했고 내가 크지 않고 있음은 몰랐구나.’ 아이의 말에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내 키가 아니라 언젠가부터 멈춰있는 내 신앙이 부끄러웠다.

교사 첫해, 여름캠프에서의 물놀이는 체력전임을 깨달았다. 아이들은 나보다 작았지만 지치지 않았다. 어떻게든 선생님을 물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아이들과 노는 것은 엄청난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캠프 파견미사 때 신부님께서는 교사들에게 한마디씩 인사를 시키셨고,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년에는 선생님이 너희들과 더 많이 놀아줄 수 있도록 힘을 기르도록 할게.” 그때의 나는, 더 나은 나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것은 열정이 되었다.

계절이 좋을 때면, 주일학교 아이들과 성지순례를 갔다. 성지에 미리 답사를 다녀오고, 아이들의 동선에 맞게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유용한 내용을 담은 활동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교사들은 스스로 공부했고, 아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눈이 내리던 날, 성당 마당의 눈을 치우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눈싸움, 아이들과 눈을 뭉쳐들고 성당 마당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던 그날 우리들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

나는 내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인 줄로만 알았고, 좋은 일꾼이 되려고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본 날들엔 빛나는 기쁨의 시간에도, 어둡기만 했던 날에도 온통 사랑이 가득하다. 내가 한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했고, 주일학교 교사로서 만나는 이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때론 사랑할 수 없어서 아팠고, 아팠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찾으며 견뎌내야 했던 시간. 그 시간마저 내가 짐작할 수 없었던 하느님의 사랑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나는 한 자리에 멈춰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나를 키워내고 계신 분은 하느님이셨다.

죽은 듯 보이던 겨울나무에서 때가 되면 꽃망울이 터져 나오고 이내 연녹색 잎을 가득 매달게 되는 가지들을 보면 보이지 않는 일들이 신비롭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듯 보이는 나에게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다. 때가 되고 계절이 돌아오면 내게서도 새로운 연녹색 잎이 자라날 것을 믿는다. 내게 또 새로운 부르심은 사랑으로 다가올 것이다.

박신희 베아트리체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