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 정호철

정호철 대건 안드레아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상임대표)
입력일 2022-04-26 수정일 2022-04-26 발행일 2022-05-01 제 329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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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곤 한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Pax Christi Korea, 이하 PCK)의 상임대표를 맡게 된 그날도 당신의 뜻을 핑계로 역할을 맡았다.

한 개인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그 일의 경중을 떠나 ‘성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는 신부가 되려다 신랑이 됐다. 사제의 삶을 꿈꾸다 세상살이를 택한 것이다.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군대 3년을 합하면 10년을 신학생으로 살았다. 참으로 고맙고 소중한 시기였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학교를 나왔고 이젠 결혼생활도 30년이 훌쩍 넘었으니 나의 신학교 이력은 아득한 옛 추억이 되고 말았다. 신학교를 중도 하차한 것은 아무래도 내 탓이 큰 것으로 스스로 결론짓고 싶다.

신학교 생활의 후유증은 내 삶의 상당 기간을 힘들게 했다. 이력서를 써야 하는 일부터 곤혹스러웠다. 신학교 이력은 결코 사회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적어도 10년 이상 나는 여전히 신학교 언저리를 헤매는 신학생의 꿈을 꾸곤 했다. 특별히 아내와 말다툼이라도 벌인 날은 어김없이 신학교로 되돌아가 있었다. 신학교 언저리를 헤매는 꿈을 졸업한 것은 아이가 중학교를 입학할 때쯤인 것 같다.

PCK 상임대표직을 맡으면서 다시금 이 직분이 나에게 또 다른 성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리고 나는 이 성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성소에 대한 나의 생각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혼인성사로 하나가 된 남녀 두 성소자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아프거나 병들거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 있을까? 희생과 봉사는 기본이고 나를 버리고 살지 않고 가정의 평화가 가능할까?

지금 생각해보니 성소는 자신이 발견하고 자신이 닦아가며 자신이 가꾸어가는 것이고 교회는 성소자의 고백을 교회의 전통과 관례 안에서 받아들일 뿐이었다. 결혼 성소도 사제, 수도 성소도 결국은 부단한 자기 노력으로 일구어 가는 것이고 교회는 버팀목의 역할을 해줄 뿐이다.

주위에서 간혹 성소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서슴없이 말한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본인이 책임을 져라. 성소는 나에게 주어진 기회이자 스스로의 자각일 뿐 교회가 당신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다. 나 외에 그 누구도 자신의 성소에 대해 책임져 주지도 책임질 이유도 없다.

나는 내가 성소로 받아들인 이 직분에 대하여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볼 따름이다.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그 다음은 어떤 결과에도 실망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일이다.

성소란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당사자가 스스로 완성해 가야 하는 ‘셀프서비스’ 이기에.

정호철 대건 안드레아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