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부활인의 행복, 놓치지 마세요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입력일 2022-04-26 수정일 2022-04-26 발행일 2022-05-01 제 329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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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5,27-32,40-41 / 제2독서  묵시 5,11-14 / 복음  요한 21,1-19
부활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아픔과 고통 극복해야 가능한 것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 의미 깨닫고
주님 마음 헤아려 기쁜 삶 살아가길

오늘 요한 사도는 그날 제자들의 명단에서 두 명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함으로 우리 모두를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주님 곁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제자들의 겸연쩍었던 마음이 눈에 선하고 손수 음식을 건네주시는 주님의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요한 사도의 이야기가 무척 포근한데요. 티베리아스 호숫가를 비추던 아침햇살, 그날의 햇빛도 1억5000만 킬로미터를 내달려 그 소박한 해변의 식탁을 비추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비추고 있는 눈 시린 봄볕에도 주님의 사랑이 묻어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꽤 오래, 그날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분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옛 삶으로 회귀하는 못난 모습이 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의 마음을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딴짓’에라도 몰두해야만 견뎌낼 수가 있었을 것이라 싶은 연민이 고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본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탓이라 싶고 이제 더는 주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별리’의 괴리감이 그들의 마음을 허하게 했을 것이라고 편을 들게 됩니다.

때문에 베드로가 불쑥 “고기 잡으러 가네”라며 딴청을 부린 것도 가라앉아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던 의도라 짐작합니다. 서로서로 아리고 쓰린 속을 감춘 채로 ‘괜찮은 양’ 아무렇지도 ‘않은 양’ 허세를 부리던 중이었기에 모두가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를 따라나서며 고기잡이에 동행했을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 마음에는 신학생 시절에 들었던 강론이 맴을 돕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푸 똑같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오래 마음에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그 강론을 들었을 때, 덜컥 마음이 내려앉던 기억도 생생한데요. 세상살이를 고작 스무 해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때, 이미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도 더, 서른 번이 아니라 삼백 번도 더, 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마음을 앓았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셨을지 꼽으며 진심으로 영혼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드릴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떳떳하고 진솔하게 사랑을 고백해 드린 적이 도대체 있기나 한지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허물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님의 호소를 외면했는지, 딴전을 피우며 무시하고 모른 척했는지… 울음이 터질 것도 같았습니다.

어쩌면 ‘믿음의 순수’일 듯도 하고 아직 삶의 때가 덜 묻었던 덕일 듯도 하지만 그 무거움과 자책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아니라는 걸 여러 해를 지내서야 깨달았습니다.

마에르텐 반 헴스케르크 ‘티베리아스 호수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솔직히 오늘 주님의 물음은 우리를 매우 곤란하게 합니다. 차라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코린토1서 13장에의 정확한 답을 베껴서 백 점을 맞을 것도 같은데, 굳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거푸 하시니 “뻔히 아시면서 무엇이 더 궁금하시냐?”고 되물을 것도 같습니다. 다 아시면서 “왜 자꾸만 물으시냐?”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을 것도 같고 뚱한 표정으로 주님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을 깨우친 믿음인이기에 주님의 질문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수월하고 편안한 안락을 추구하는 부활이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놓여있으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아가는 일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친 진리의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난 없이 부활로 건너뛸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으며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상태로는 결코 부활의 열매만 달랑 딸 수가 없다는 걸 입으로 달달달 외울 수 있고 머릿속에 좌르르 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랑도 용서도 화해도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로 표현하며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일에 머물러 지난 허물을 탓하며 우울해합니다. 주님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 참회의 삶인 양 오해합니다. 정녕 주님께서 통탄하실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모두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지은 어떤 죄도 깡그리 없애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항상 기쁘고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좋은 축복, 귀하고 복되며 고귀한 은총을 빠짐없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인 까닭입니다.

하여 오늘도 그날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뜻과 동떨어져서 딴짓에 몰두하며 ‘헛수고’를 하는 우리 이름을 간절히 부르십니다. 부디 이제부터는 다시, 또, 새로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속내를 헤아려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다고 믿습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아멘.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