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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7)최양업 신앙의 뿌리를 찾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4-26 수정일 2022-04-26 발행일 2022-05-01 제 329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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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신앙 살아낸 선조들의 믿음 물려받아
증조부 최한일로부터 전해진 신앙 유산
교우들의 신심 북돋우기 위해 열심했던
최경환 성인의 행적 「기해일기」에도 담겨 
부모의 깊은 신심 이어받은 여섯 형제들 
박해 위험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 지켜

탁희성 화백의 ‘최경환 성인을 방문한 모방 신부’. 모방 신부는 최양업의 유학을 논의하기 위해 방문했다.

최양업의 신앙 뿌리는 증조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양업의 증조부인 최한일은 초기 조선교회 전교에 공헌한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웠다. 열심한 신자 집안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한 최한일은 아들 인주를 낳았고, 그의 손자가 바로 최양업이다.

최한일이 일찍 세상을 떠나 둘만 남은 모자는 어려운 생활을 이어간다. 걸식을 하거나 방을 빌려 자야하는 생활 중에도 이씨는 “천주는 전지전능하시어 천지만물을 이같이 조성하셨고 사람을 기르시며 또 우리 사람들은 생전에 행한 선악대로 상과 벌을 영원히 받는다”고 아들에게 가르쳤다. 삶의 고난 가운데서도 두 모자는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홍주 누곡(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 들어온 모자는 이곳에 터를 잡는다. 이후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들 최양업은 이곳에서 신앙의 유산을 이어간다.

■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최양업의 부모

첫째 아들 최양업을 비롯해 여섯 형제의 신심이 깊어질 수 있던 이유는 부모의 남다른 신앙교육에 있었다. 삶에서 늘 신앙을 실천했던 최경환에 대해 넷째 아들 최우정은 “항상 자신을 가볍게 여기고 남을 중하게 여기셨던 분”이라고 전했다.

또한 「기해일기」에는 성 최경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낮이면 세상 일에 힘쓰고, 저녁이면 집안 사람과 여러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밝게 강론했으며 주일과 판공 첨례를 만나면 더욱 그 열심을 드러내 기도문을 읽거나 강론하고 서적을 보는 일을 기쁘고 성실히 했다.’ 최양업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다”며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고 전했다.

최양업의 어머니 복자 이성례 마리아도 남편 못지않은 지혜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나이 어린 남편을 공경하면서 가정의 화목을 위해 노력했으며, 어린 자식들에게는 신앙의 교훈을 통해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줬다. 끊임없는 피신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골고타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궁핍한 생활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고 “이런 고통은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모범과 어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구해 받는 것이다”라며 큰 영광으로 삼았다.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 입구에 세워진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의 동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부모님의 신심, 최양업과 다섯 형제들에게 전해지다

성 최경환과 복자 이성례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양업은 희정(야고보), 선정(안드레아 혹은 베드로), 우정(바실리오), 신정(텔레스포로), 스테파노까지 다섯 동생을 뒀다. 부모님의 깊은 신심을 이어받은 최양업의 형제들은 박해로 인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최양업과 4살 터울인 동생 최희정은 어머니가 형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아들이다. 박해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는 어머님의 유언을 지키며 살았던 최희정은 충북 진천군 바라산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최선정은 비범하고 강개한 성정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는 박해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최양업 신부가 선물로 준 성 십자가 보목과 묵주 한 벌을 행장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서학도의 물건을 지녔다는 이유로 목숨이 위험할 것을 우려해 이를 불태우려 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정은 “그 물건을 불에 넣으면, 당장 천벌이 내려지리라”고 호통을 쳤다.

최우정은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블랑 주교의 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블랑 주교로부터 조선 신자들에게 전하는 글을 전해 받은 최우정은 충청·경상·전라도 지역을 다니며 신자들에게 이 서한을 전했다. 추운 겨울, 객지에서 굶어 죽을 위험 속에서도 여정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3개월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이에 기뻐한 블랑 주교는 자신과 함께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최우정은 1877년 충주 숭선(현 충북 중원군 신니면 문숭리) 점촌에서 블랑 주교의 사목활동을 도왔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