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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어느 생쥐 가족의 잔혹사 / 최영균 시몬 신부

최영균 시몬 신부,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2-04-20 수정일 2022-04-20 발행일 2022-04-24 제 329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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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매주 연속해서 칼럼을 연재한다는 건 다소 스트레스가 된다. 글을 마무리하여 편집부에 보내고 나면 다음 주는 무엇을 쓸까, 그 소재를 계속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성당 사람들과 수다를 떨던 자리에서 함께 있던 수도회 소속 김 신부에게 툭 던졌다. “다음엔 신문에 뭘 써볼까? 매주 소재를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네.”

그러자 김 신부가 “거 있잖아, 지난번에 쓴 ‘고양이의 보은’ 재밌었는데 그 후속탄 써봐. 이번엔 쥐의 관점에서 써보면 어때?”라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쥐가 왜?” 내가 묻자 김 신부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어느 날 아빠 쥐가 고양이한테 물려 죽어 성모상 앞에 던져진 모습을 그 자식 생쥐가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 근데 며칠 있다 이번엔 엄마가 반쯤 죽었어. 걘 얼마나 불쌍해.”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 나는 한술 더 떠 “그럼 고양이의 보은 시즌2, 생쥐 가족의 잔혹사로 써봐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김 신부와 생쥐 가족 잔혹사에 대해 농담처럼 주고받은 대화에서 장자에 나오는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춘추시대에 모장과 이희는 절세의 미인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녀들을 보면 물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높이 날아가 버리고, 고라니는 후다닥 달아나 버린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중 누가 천하의 바른 색깔(참된 진실)을 알고 있을까? 사람 눈엔 그 여인들이 아름다움이지만, 작은 생물의 입장에선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다. 장자는 아름답고 선한 것, 의로운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리 정의롭고 좋은 일이라도 이 세상에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살펴야 한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 은혜를 갚은 것은 의롭고 아름다운 가치이나, 쥐의 입장에서는 불의하고 슬픈 일일 것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8,11) 이야기는 인간 삶의 상대적 원리에 대해 말해준다. 사람들은 여인을 법의 정의를 세워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나이든 사람부터 현장을 벗어났다. 그들이 여자의 죄를 물을 때 들이댄 법과 정의의 기준을 자신에게 돌렸을 때, 자신들도 때로는 그것을 무너뜨리는 입장이 되기도 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올 때 단죄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르신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소외된 타자에 대한 자비심을 갖도록 일깨워 주셨던 것 같다.

찬란히 빛나는 사람의 반대쪽에는 소외 당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안식처에 대해 보은하려 했던 고양이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한 생쥐 가족의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으로 연대하고 싶다.

최영균 시몬 신부,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