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3)교육, 공론장, 문화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4-19 수정일 2022-04-19 발행일 2022-04-24 제 3291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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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쇄신하려면 참교육과 건강한 담론이 문화로 구축돼야
공감과 인정 방식의 참교육과
진정한 가치의 담론 형성돼야 
형성된 담론이 문화로 확산되면
세상 변화와 쇄신으로 이어져

부산교구 청년들이 사목자와 함께 2020년 11월 20일 청년사목 침체에 관한 주제로 토론회를 하고 있다. 건강한 사회는 그 안에 좋은 공적 담론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회다. 올바른 가치와 삶에 관한 담론들이 공적 자리에서 이야기되고 또 사람들 마음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 비하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와 미래를 희망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암울한 전망을 낳는다. 기후위기라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기후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확인한다. 모든 것이 수도권 중심으로 돌아가고 지방은 점점 소멸의 과정을 겪고 있다. 주변에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요양병원’이라는 간판을 쉽게 발견한다. 고령화와 출생률의 현저한 저하 현상이 어두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소수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족주의 현상이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자꾸만 불가능하게 한다.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중요시하는 세상의 추세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의 부재를 초래한다. 타자는 그저 경쟁 상대이거나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방 어디를 돌아봐도 우울한 풍경만 보인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한 정치권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지만, 가난한 계층의 삶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세상은 여전히 권력과 자본의 힘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슬픈 진실을 목격한다. 언론을 통해 생산되는 뉴스는 늘 권력과 자본의 동향에만 민감하다.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들은 뉴스에서 전혀 취급되지 않는다. 약자들의 고통과 아픔의 소리는 여전히 은폐되고 있다. 교회 언론에서도 고위 성직자들의 동정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힘을 가진 사람들의 기사만 보인다. 일반 시민들과 일반 신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가끔 미담과 약자 돕기라는 시혜적 차원에서 구색 맞추기용으로 사용될 뿐이다.

매체와 공론장의 풍경 역시 희망적이지 않다. 언뜻 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의 발생은 대중민주주의의 승리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인터넷 매개의 장이 얼마나 교묘한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말이다. 기술과 권력과 자본의 결합은 사람들의 사유방식(정신)과 통교방식(환경)마저도 길들이고 있다. 권력의 통치는 ‘지배’에서 ‘관리’라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기계, 권력, 사회」)

사회의 풍경, 정치의 현실, 공론장의 환경, 그 모두가 암울한 느낌으로 온다. 너무 비관적인 전망일까.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의 정직한 진술이 시사적이고 외려 희망으로 다가온다. “현시점에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이 위기대응 매뉴얼을 펴내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민주주의를 뒤집어엎으려는 자들도 포퓰리즘-권위주의 통치 기술을 완벽하게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경험했다시피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반드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종국에는 결집한 시민만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민주주의 공부」) 거듭 반복되는 결론이지만, 세상의 변화와 쇄신은 시민의 변화와 성숙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민의 변화와 성숙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인간의 선한 본성과 능력을 믿고(「휴먼카인드」), 이성과 과학과 휴머니즘의 힘을 긍정하면 되는 것일까.(「지금 다시 계몽」)

■ 의식과 문화의 변화, 구조와 제도의 변화 사이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기보다는 구조와 제도가 사유와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구조와 제도의 변화는 중요하다. 하지만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초래하고 견인하는 힘은 사유와 의식의 변화에서 발생한다. 구조와 제도의 변화는 긴 여정의 사업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유와 의식의 변화는 새로운 문화를 낳고, 새로 탄생한 문화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구조와 제도를 요청한다.

구조와 제도의 변화, 법과 규범의 변화는 정치적 영역에 속한다.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가 앞당겨질 수 있다.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위적 선구자들과 정치적 운동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조와 제도의 변화는 의식과 문화의 변화와 함께 가지 않으면 늘 실패한다. 단기적으로는 구조와 제도의 우선적 변화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의식과 문화의 변화가 담보될 때만 진정한 변화와 쇄신이 이루어진다. 사회(공동체)의 진정한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는 선도적 정치가, 선구적 지식인, 깨어있는 시민들의 결합이 필요하다. 물론 시민 스스로가 좋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 의식을 담아내고 표현해내는 참다운 지식인, 시민들의 의식을 정치적 힘으로 구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정치인이 가끔 그립다.

■ 교육의 정상화, 공적 담론의 형성, 대안 문화의 구축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는 학교와 종교, 언론, 대중문화의 장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오늘날 이 모든 자리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성당과 교회와 절에서, 공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언론과 공론장에서, 공동체적 가치와 문화가 제대로 전수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시민의 변화와 성숙은 교육과 종교와 언론의 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회의 문화적 토대가 형성되는 영역들의 변화와 쇄신이 긴급히 요청된다.

진정한 교육은 일방적 가르침과 지시와 훈육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다운 교육은 공감과 인정의 방식으로, 대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함께 하는 공부가 교육이다. 성공과 출세 지향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한 세상의 변화와 쇄신은 요원하다. 교육의 목적과 지향, 교육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쇄신이 필요하다.

건강한 사회는 그 안에 좋은 공적 담론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회다. 성문화된 규칙과 규범을 넘어 진정한 가치와 정신을 담은 어떤 공적 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올바른 가치와 삶에 관한 담론들이 공적 자리에서 이야기되고 또 사람들 마음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공적 담론은 사람들을 이끄는 메시지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대와 돌봄에 대한 공적 담론의 형성은 사람들을 더 연대하게 하고 타자에 대한 관심과 우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은 문화를 만들지만 동시에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건강한 가치와 정신은 공적 담론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적 차원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와 쇄신은 새로운 정신을 담아내는 대안 문화의 구축에 달려있다.

교육 시스템의 쇄신, 건강한 공적 담론의 형성, 새로운 대안 문화의 구축이 공동체의 변화와 쇄신을 담보한다. 예수의 삶을 봐도 그렇다. 예수는 진정한 교사였고, 공적 담론의 예언적 선포자였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문화를 구축한 선구자였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