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4)

정리 남재성 기자
입력일 2022-04-13 수정일 2022-04-13 발행일 2022-04-17 제 329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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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만연한 전쟁의 참혹상을 목격하다
6·25전쟁 발발하며 포로수용소 사목
수시로 전황 뒤바뀌며 많은 이들 잡혀와
중환자 텐트에는 이질·결핵 환자들 많아
임종 임박한 이들 찾아다니며 대세 줘 

1951년 뉴욕대교구 스펠만 추기경과 유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 포로수용소 군종신부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즐거움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며 민족의 비극이 시작됐다. 당시 메리놀 외방 전교회(메리놀회) 신부님들은 미군에 군종신부로 들어가게 됐고, 별다른 계급은 없이 십자가를 달고 채플린(chaplain, 군목)으로 활동했다. 그때 메리놀회 기 신부님(Hugh C. Craig)이 부산에서 포로수용소 사목을 담당했다. 메리놀회가 활발히 전교를 펼쳤던 평양교구 출신인 나는 기 신부의 보좌로 발탁돼 유엔군 소속으로 포로수용소로 가게 됐다.

유엔군에 채용된 군종신부는 군복도 입지 않았고, 월급도 유엔에서 ‘군속(군무원)’으로 고용된 의사와 같은 전문직 1급 수준으로 받았다. 월급 외에도 주임신부인 기 신부에게서 미사예물을 받았다. 또 필요한 물건은 미군 측에서 보급 받거나 구제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모였다.

하지만 나는 월급날이면 늘 걱정이 많았다. 신부 복장을 하고 월급을 받는 모습을 포로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전교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이었다. 군 노무처 사무실(레이버 오피스, Labor office)에서 월급을 수령하는 데 다른 군인이나 포로들이 다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 신부님께 “군에서 주는 월급은 안 받는 게 낫겠다. 남들이 보면 신부가 전교를 하는 게 아니라 직업적으로 돈 벌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겠느냐. 전교에 방해가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기 신부님은 “자네가 그걸 안 받으면 내가 그 월급을 따로 줘야 하지 않느냐. 그러면 전교에 쓸 돈이 그만큼 부족해지는 것이다”라고 답해 나는 월급을 계속 받게 됐다.

1951년 4월 부산 포로수용소의 중공군과 인민군 포로 . 출처 미국 국방부

■ 전쟁 속 일상

포로수용소 군종신부에게 정해진 일과로 ‘정신훈화시간’이 있었다. 특별한 강론이나 전교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훈화라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주임 군종신부인 기 신부에게 ‘도대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냐’며 도움을 청했지만, 기 신부는 ‘그저 정신적으로 훈화를 하라’며 미국 군목들이 보는 영어로 된 참고 강론집을 줬다. 그러나 그건 열심히 읽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6·25전쟁이 한창 격해지면서 갑자기 수만 명의 포로들이 생겨서 부산시 외곽에 가시철망을 둘러친 포로수용소가 여러 군데 생겼다. 기 신부님이 수용소를 관리하는 유엔군 측에 미리 연락하여 정한 날, 정한 시간에 수용소를 방문하면 수천 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철책이 둘러쳐진 한 구역(compound)에 집합했다.

처음으로 맞이한 훈화시간, 단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딱히 이렇다 할 만큼 강조할 주제도 없고 해서 5분 남짓 이것저것 얘기하다 적당히 끝맺었다. 그리고 군종신부가 정한 천막에서 미사를 드리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참례하고, 비신자들이라도 교리를 배워보고 싶은 사람들은 찾아오라는 말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시원찮게 훈화를 끝내고 기 신부와 함께 거처로 돌아오는데, 기 신부가 대뜸 내게 “오가는 데 쓰는 휘발유가 아깝다”며 면박을 줬다. 지금 돌아봐도 너털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개인적으로 포로수용소의 일상에서 겪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현실은 참으로 달랐다.

수시로 전황이 뒤바뀌며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 중에는 중공군이나 북한 인민군뿐 아니라 서울에서 징집병으로 끌려온 포로들도 있었다. 매일 포로수용소 내 병원 텐트를 방문하면 환자들은 군용 해먹에 축 늘어져 누워있었다. 특히 중환자 텐트에는 이질과 결핵 환자들이 많았다. 임종이 임박한 이들을 찾아 준비가 되면 대세를 줬다. 그러나 지난주에 봤던 환자가 다음 주에 방문하면 이미 사망하고 없어 침상이 비워져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죽음이 만연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용소 내에서 분란도 크게 발생했었다. 부산에서 옮겨간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 간에 이념 갈등이 생겨 수용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야단이 났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포로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에게 붙잡혀 포로 아닌 포로가 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중에 소장이 바뀌고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내가 느꼈던 전쟁의 참상은 포로수용소에서의 작은 경험 정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이 됐다. 해마다 명절이 돌아올 때면 그리운 가족들이 많이 생각난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피난민들이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죽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전쟁은 이토록 참혹한 일인 것이다.

정리 남재성 기자 nam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