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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4)배티 신학교에서 피어난 조선인 사제에 대한 희망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4-05 수정일 2022-04-05 발행일 2022-04-10 제 328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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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조선 땅에 사제 성소의 싹 틔우기 위해

배티 교우촌에 자리잡은 최초 신학교
대목구장 주교 인준 받고 정식 운영
라틴어 가르친 다블뤼 신부 말을 통해
신학 공부 위한 기초 배운 것으로 추정
배출된 3명의 신학생 유학길 오르기도

배티는 최양업 신부가 1853년 여름부터 3년가량 사목 중심지로 삼아 머물던 곳이다. 또한 이곳에 세워진 배티 신학교에서 3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다. 배티 신학교 출신 이 바울리노, 김 요한 사도, 임 빈첸시오는 이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 진천의 작은 교우촌 ‘배티’, 조선인 사제 양성의 초석 놓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교회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되자 조선인 사제 양성을 재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데다가 추가 선교사 파견도 이뤄지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후 페레올 주교는 1849년 본격적으로 사제 양성 사업을 시작했다. 페레올 주교가 각각 1849년과 1850년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한에는 “이제 막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 “조선대목구에는 허술한 작은 신학교가 있습니다… 유럽인 선교사(다블뤼 신부)는 몇 명의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된다. 설립 초기 신학교는 대목구장 주교가 인정한 정식 기구는 아니었으나 페레올 주교는 신학생 양성을 위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사업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1849년 말에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양성 사업 책임자로 임명된 다블뤼 신부는 신학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조만간 겨울 동안에 교실로 사용하려고 마련해 둔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 두 칸이 있는 대단히 큰 집인데다가 우리에게 약간은 필요한 이웃집들이 있는 곳입니다.”

겨울에 머문 신학교가 진천의 배티 교우촌에 있었다는 근거는 신학생 중 한 명이 이곳 출신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페롱 신부는 1858년 9월 25일자 서한에서 “신학생 중 한 명인 이 바울리노가 오랫동안 배티 교우촌에서 다블뤼 신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밝힌다. 다블뤼 신부는 이곳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산을 개간해 채소를 키우거나 옥수수·담배 등을 경작하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던 신학교가 1851년에 이르러 배티 교우촌에 자리를 잡았다”며 배티 신학교가 대목구장 주교의 인준 아래 정식으로 운영된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라고 밝혔다.

배티 신학교를 정식 신학교로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내포교회사연구소 방상근(석문 가롤로) 연구위원은 「1850년대 신학교의 설립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배티 신학교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성격이 강한 신학교”라고 설명했다.

최양업이 배티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문헌은 없다. 하지만 신학생을 언급한 서한을 통해 그가 신학교에 거처하며 신학생들을 지도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최양업은 열 번째 서한에서 “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에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페낭)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전한다.

■ 배티 신학교에서 배출한 3명의 신학생

페레올 주교가 1850년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한에 따르면, 설립 당시 조선대목구 신학교에는 신학생 5명이 있었다. 또한 라틴어를 담당한 다블뤼 신부와 한문을 담당한 조선인 교사 1명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가르쳤다”는 다블뤼 신부의 말을 통해 신학생들은 자신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나 신학 공부를 위한 초보적인 내용, 이와 관련된 유럽의 근대 학문 등 폭넓은 내용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립 초기에 겨울과 여름에 학교를 옮겨 지냈던 신학생들은 1851년 11월부터는 배티 신학교에 정착해 공부했다. 5명이었던 신학생 중 배티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유학길에 오른 이들은 3명이었다. 이 중 이 바울리노와 임 빈첸시오는 다블뤼 신부가 선발했고, 김 요한 사도는 최양업이 선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목지에서 김 요한 사도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지역을 순방하던 최양업은 방축골(현 음성군 맹동면 봉현리)의 교우촌에서 순교자 김백심(암브로시오)의 3남인 김 요한 사도를 만났다. 이후 김백심과 상의한 뒤 김 요한 사도를 신학생으로 선발한 최양업은 그의 사제 성소를 키우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

최양업은 1854년 11월 4일자 서한에서 “김 요한이라는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해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버림받을 위험이 있어 염려가 된다”고 페낭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1854년 3월 중국으로 떠난 세 명의 신학생은 1년 4개월 만에 말레이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에 도착했다. 각각 23살, 20살, 18살 어린 청년이었던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고 페낭 신학교 교장 마르탱 신부는 평가했다.

하지만 이 바울리노는 건강상의 이유로 유학 1년 4개월 만에 퇴교했다. 1863년 6월 말 페낭에서 귀국한 임 빈첸시오와 김 요한 사도는 그해 여름 동안 사제 성소와 학업 성과에 대한 평가를 받은 뒤 배론 신학교로 편입했다. 베르뇌 주교는 이에 앞서 임 빈첸시오에게 삭발례를 줬으나 김 요한 사도에 대해서는 “자신의 성소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후 김 요한 사도는 신학교에서 나왔고 임 빈첸시오는 남은 신학 과정을 계속 이수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배론 신학교가 폐쇄되면서 신학생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임 빈첸시오의 행방도 찾을 수 없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