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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2)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보낸 열 번째 서한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3-23 수정일 2022-03-23 발행일 2022-03-27 제 328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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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선교사들 피땀으로 뿌린 복음의 씨앗

박해 피해 은밀하게 신앙 전해야 했던
선교사들의 활동 불손한 것으로 여겨
갖은 심문과 고초 끝에 참수 당해
프랑스 정부 통한 천주교 공인 요청
신앙의 자유 얻기 위한 노력을 당부

탁희성 화백의 ‘죽음의 행렬’.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는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와 함께 교우들이 다칠까 염려하여 스스로 자수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9세기에 들어와 급변하는 세계 질서에 편입된 동아시아. 중국뿐 아니라 조선까지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세력이 점차 유입됐고, 낯선 문화의 등장은 충격과 위협으로 다가왔다. 서구 세력으로 인한 조선 내부의 혼돈은 천주교 선교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모방 신부는 비밀리에 잠입해 반역의 무리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처형을 당했고, 1846년 8월 홍주 외연도(충남 홍성군) 앞바다에 도착한 프랑스 함장 세실의 군함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항의하는 서한’을 궤 안에 두고 철수한다.

■ 병과 고초로 어려움 겪는 선교사 신부에 대한 안타까움

최양업은 여덟 번째, 열 번째 두 서한에 걸쳐 흉악한 오랑캐라는 비난을 받으며 고생 끝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선교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한다.

최양업은 먼저 프랑스 세실 함장이 조선에 전한 편지를 소개한다. “프랑스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 샤스탕, 모방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 묻고자 왔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그분들을 체포해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을 집행했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해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이렇게 회답한다. “그들은 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해 문초했습니다. 심문을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도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우리나라 형법에 따라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몰래 입국해 몰래 교리를 가르치고 은밀하게 신앙을 전해야 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조선 사람들에게는 음흉하고 불손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미 조선 안에 퍼진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기 어려웠을 터.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해 사목하는 동안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염원했다. 이와 관련해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중국 황제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도록 설득해 주십사고 프랑스 영사에게 부탁하실 수 없습니까?”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최양업 역시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와 프랑스 함대가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는 1849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서한에서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인 프랑스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이미 시작한 좋은 일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하며 프랑스 함대를 조선으로 보내 우호조약을 맺고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노력해 주길 당부했다.

당시 조선사회에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정부의 노력이 있다면 천주교가 떳떳하게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있었다는 것을 최양업의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선교사들이 굉장한 함선을 타고 공개리에 떳떳하게 조선에 들어오고 또 저들이 조선에서 전교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충분한 증명을 들어서 조선 정부에 부탁한다면 그들의 임무수행에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프랑스 정부가 천주교를 조선에서 공인받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조선 정부는 들어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조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 세 명의 신학생, 페낭으로 보내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교회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되자 한국인 사제 양성을 재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후 페레올 주교는 건강이 좋지 않은 다블뤼 신부에게 교우촌 순방 대신 신학생 교육을 맡길 계획을 세웠고, 1849년 말 다블뤼 신부를 사제 양성 사업 책임자로 임명했다. 최양업도 1853년부터 신학생을 지도했다.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쓴 서한에서 최양업은 “지난봄 세 학생을 강남 거룻배에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밝힌다. 최양업이 페낭으로 보낸 3명의 신학생은 이 바울리노와 김 요한 사도, 임 빈첸시오라고 전해진다. 최양업은 홍콩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맞이한 리브와 신부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그 학생들 중 김 요한 사도라는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합니다.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버림받을 위험이 있어서 상당히 염려가 됩니다. 또 학생들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