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환자와 보호자에게 배운 삶의 자세 / 고영초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입력일 2022-03-22 수정일 2022-03-22 발행일 2022-03-27 제 3287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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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외과 조교수 시절이었던 1988년, 당시 치료했던 사지 마비 환자를 잊을 수가 없다. 중학교 동창인 한 신부로부터 조카 데레사가 3층에서 떨어져 마비가 되었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고는 즉시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오게 했다. 환자는 28세로 파리 유학을 앞두고 있던 미술학도였는데, 아파트 3층에서 유리창을 닦다 갑자기 들려온 시끄러운 소리에 몸을 돌리다 추락한 것이었다.

뇌손상은 없었으나 하지는 완전 마비였고 상지는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를 겨우 움직일 정도였다. CT 검사 결과 5-6번 목뼈 골절과 탈구가 확인되었다. 경수 손상으로 진단하여 스테로이드 고용량을 처방하고 환자의 신경학적 소견이 안정화되자 수술에 들어갔다. 6번 목뼈 골편이 떨어져 척수를 압박하는 소견이 있어 골편 제거술과 플레이트와 나사못으로 골절된 5~6번 목뼈를 고정했다.

수술 일주일되는 날 아침 회진 때였다. 갑자기 환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오른손을 이마에 힘겹게 가져가 성호를 긋는 동작을 보여 주었다. 손가락 움직임이 안 되어 원숭이 손처럼 어설프긴 했지만, 성호를 그을 수 있게 되었다고 몹시 기뻐했다. 평생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도 그런 기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행위를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는 환자로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순간이었다.

건국대병원에서 5년 전에 처음 본 마리아씨는 60대 중반인데, 기관지 절개창과 위루관을 지니고 의식 없이 지내는 소위 식물인간 상태였다. 마리아씨는 10년 전 갑자기 우반신 마비와 실어증으로 가톨릭 계열 대학 병원에서 뇌출혈을 동반한 뇌동정맥 기형 진단 하에 응급 혈종 제거술을 받았다.

뇌수술이 안정화된 후에는 뇌동정맥 기형에 대해 두 차례 방사선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의식 회복 없이 집으로 퇴원하여 월 1~2회 방문 간호를 받으면서 남편의 전적인 보살핌을 받아 왔다. 남편 요셉씨는 그 대학병원에서 마리아씨의 정기적인 통원진료를 받아왔으나 집도의가 은퇴하면서 지인을 통해 나를 찾은 것이었다.

요셉씨는 지난 5년간 3개월에 한 번씩 외래로, 환자에게 필요한 약물들과 영양식을 받아가고 6개월마다 환자를 데려와 기관지 튜브와 위루관을 교체하고 있다.

요셉씨는 지난 10년간 환자와 24시간 붙어 있으면서 가래를 뽑아 주고, 먹여 주고, 기저귀를 갈아 주고, 대변 처리 등을 정성껏 해 왔다. 지난 5년간 환자는 의식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욕창 하나 없는 해맑은 모습이었고, 요셉씨도 24시간 간병하는 것을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10년 동안 데레사를 돌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고까지 말해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지난 45년 간을 대학 병원 신경외과 의사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편히 숨 쉬고, 걷고, 먹고 마시는 일을 갈망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해야만 할 일인지 깨닫게 된다.

요사이 ‘감사나눔신문’을 통해 감사 일기, 감사 편지 등 감사 체험담들을 접하면서, 우리 일상의 삶 자체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다.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