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테니스 삼락(三樂) / 고영초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입력일 2022-03-07 수정일 2022-03-08 발행일 2022-03-13 제 328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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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을 시작한 1971년 봄에 처음 테니스를 시작했다. 국산 한일 라켓 값은 2500원이었는데, 그에 비해 공은 수입품이라 세 개짜리가 한 통에 2700원이나 했다. 테니스 코트가 개천가에 있어, 공이 라켓 프레임에 맞으면 운동을 중단하고 코트 밖으로 공을 찾으러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자칫 그 비싼 공이 개천에 떠내려가면 몇 번 치지도 못하고 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끈기 있게 주워 젖은 공을 말려가면서 열심히 땀을 흘렸다.

1977년 5월 인턴 시절 공식적인 테니스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서울의대 신경외과교실에서는 매년 ‘심스컵’이란 초대 주임 교수님의 이름을 딴 테니스 대회를 개최해 왔는데, 나도 교실에 함께하면서 대회에 초대됐다. 당시 나는 처음 출전한 초보자라 하여 실력이 좋은 교수님의 파트너로 지정되었다. 파트너 교수님께 누가 될까 긴장했었는데,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위치를 바꿔 가며 공을 넘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 전문의 취득 후 군의관으로 전방 야전 병원에 배치되었다. 그때는 매주 수요일 오후 전투 체력일이라고 해서 근무 대신 테니스를 했다. 동료 군의관 중 상당한 구력이 있는 군의관 7~8명과 복식을 즐겼다. 퇴근하면서 부대 앞 단골 구멍가게 아주머니의 맛있는 계란말이와 김치 안주로 군납 맥주를 몇 박스씩 비웠다.

사단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에는 선수 출신 테니스장 관리 사병이 있었다. 그 사병에게 단식을 배웠다. 처음에는 40대 0 핸디캡으로 배려를 받다가 후에는 30대 0으로 시작하면서 실력이 차츰 늘었다. 제대 후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일과 후에도 테니스를 치는 날이 많아졌다.

독일 하노버에서 1989년 2월부터 1년간 연수를 할 적에는 충남대학교와 카이스트에서 오신 한국인 교수 두 분과 토요일 이른 새벽에 셋이서 돌아가면서 단식을 즐겼다. 아침 아홉 시경 샤워를 끝내고 우리가 클럽 하우스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그제야 코트에 나오는 독일인들은 한국인의 부지런함과 테니스 실력을 많이 부러워했다.

해외 연수에서 돌아와 학회 임원이 되면서 학회 공식 운동으로 골프 외에 테니스를 추가할 것을 제안해 신경외과학회 테니스 대회를 만들었다. 제1회 신경외과학회 테니스 대회가 1991년 열렸고, 나는 신경외과학회 테니스 대회 총무와 회장을 역임하면서 7차례 우승을 했다.

그동안 테니스를 40년 가까이 하면서 많은 즐거움을 느꼈다. 그렇게 테니스를 치면서 느낀 즐거움 세 가지, 즉 ‘테니스 삼락(三樂)’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일락(一樂)은 테니스를 치는 동안의 기쁨으로, 서브 에이스, 강 스매싱, 절묘한 드롭 샷이나 발리로 점수를 냈을 때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락(二樂)은 운동 후 땀범벅이 된 몸을 따뜻한 물로 샤워 후 마지막에 냉수로 씻어 낼 때의 피부 청량감이다. 삼락(三樂)은 몸과 마음이 개운한 상태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즐거움이다.

지금도 20~30년 전과 같은 테니스 실력은 아니겠지만, 그 옛날 느꼈던 테니스 삼락은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하루빨리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벗어나 테니스 삼락을 자주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