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9)1851년 절골에서 보낸 여덟 번째 서한①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2-28 수정일 2022-03-02 발행일 2022-03-06 제 3284호 1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비신자들 마음에 진리의 빛 비춰주신 하느님
외교인들 눈 피해 사목 순방하면서
비신자 선교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
가혹한 핍박과 비난 속에서도
하느님 향한 신자들 믿음에 감동 받아
스스로 천주교 믿는 이들 생겨나기도

멍에목 공소를 방문하는 최양업의 모습을 표현한 이미지.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조선에서 사목 순방을 시작한 지 5년, 당시 127개 교우촌을 담당했던 최양업은 전국 곳곳에서 신자들과 만났다. 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됐다. 최양업은 서한에서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한밤중에 공소 순회의 모든 것을 끝마치고 새벽 동이 트기 전 그곳을 떠나야 한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 하지만 사목활동의 어려움 속에서도 최양업은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한다. 1851년 10월 15일 충청북도 진천군의 교우촌인 절골에서 쓴 최양업의 서한에는 비신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춰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 언급된다.

■ 멍에목에서 만난 양반 조씨

충청북도 보은 구병산 산기슭 중턱에 위치한 멍에목에 살고 있던 천주교 신자들. 지체 높은 양반으로 언급되는 조씨는 천주교를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씨는 멍에목에서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멍에목에 집을 지으려고 들렀던 조씨는 갑작스런 화재로 잿더미가 된 마을을 보게 됐는데, 마을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도 평온한 얼굴로 태연하게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씨는 모든 것을 잃고도 조금도 근심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지만 입을 열지 않던 신자들은 계속되는 회유에 이렇게 실토한다.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도 흔들리지 않았던 신자들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있었던 것이다. 조씨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며 천주교를 믿기 위해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우기 시작했다.

최양업은 멍에목 교우촌에서 조씨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며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으나 개종해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되셨다”면서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들 중에 가능한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라”고 전한다. 비신자들이 신자들을 핍박하고 증오하는 가운데서도 조씨처럼 하느님을 향한 신자들의 믿음과 신념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있었다고 최양업은 전한다.

청주교구 보은 멍에목성지 경당.

■ 신자들에게 쏟아진 비난

당시 신자들은 자신이 신자인 것이 밝혀지면 감옥에 가거나 배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신자들의 체포, 투옥, 형벌, 사형은 당시 비신자들에게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최양업은 여덟 번째 서한에서 이같이 밝힌다.

“신자들의 집안이 몰락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는 것, 사람이 살 수 없는 산속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잊혀 산다는 등의 신자들에 대한 험담이 비신자들 사이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제사와 위패를 배척한다는 이유로 불경스럽고 불충한 이들로 취급받은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금수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 권력 다툼에 이용된 천주교

최양업은 절골에서 쓴 서한에서 1801년 신유박해를 언급하며 “그때 천주교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자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임금님의 총애를 받으며 나날이 더욱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몇몇 유력한 천주교 신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을 꾸며냈다”고 설명한다.

당시 왕이었던 순조. 그의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이끄는 벽파 세력은 반대파인 시파가 천주교에 개방적이었기에 그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시작한다. 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던 순조의 형 은언군 이인이 그 희생양이 된다. 이에 대해 최양업은 “천주교의 원수들은 임금님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합법적인 금상 왕을 폐위하고 이인이라는 왕족을 새 임금님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모함했다”고 밝힌다.

은언군 이인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내와 며느리가 신자였기에 천주교 신자들의 두목이자 반역자라는 모함을 받은 것이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관련된 이들에게 가혹한 핍박이 가해졌다는 것을 서한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인의 가족들은 형언할 수 없는 천대와 터무니없는 중상으로 산산이 흩어졌으며 어떤 아들들은 사형을 당했고 어떤 자손들은 극단적인 비참 속에 내버려졌습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