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사순 제1주일·성 요셉 성월 - 사랑을 알 만큼 아는 그리스도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입력일 2022-02-28 수정일 2022-03-02 발행일 2022-03-06 제 328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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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신명 26,4-10 / 제2독서  로마 10,8-13 / 복음  루카 4,1-13
인류 구원 위해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 기억하고
갖은 유혹 일삼는 사탄에 맞서
주님의 복음 끝까지 실천하길

사순 시기, 사제는 보라색 제의를 입고 참회의 미사를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온 인류가 순결한 영혼으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총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팬데믹이 언제 끝날지 요원하기만 하니 교회의 청원이 더욱 간절하고 간곡하고 깊습니다. 제발 주님의 극심한 고통을 보라색 제의로 기리는 교회의 모습이 주님께 사랑스럽기를 청하며 “초록에 핏물이 들어야 보라가 될 수가 있다. 고통의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보라. 보라는 삶을 알 만큼 아는 사랑의 색, 사랑을 알 만큼 아는 자의 색이다”(장석주, 「색채의 향연」)라는 글로 세상에 위로를 건네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순명하여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모세의 길고 긴 이별사의 일부분입니다. 그때 모세의 이별사를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 이런 일이…!” 싶었을 것도 같고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도 같은데요. 모세야말로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모세와 함께하지 못하는 현실이 혼란스럽고 막막했을 것이 뻔하니 말입니다.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그들이 눈에 밟혀서 모세의 이별사가 이리도 길고 섬세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적고 보니 불현듯 신학원장의 소임을 맡아 예상보다 빨리 본당을 떠나오던 날이 기억납니다. 매서운 ‘대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중에도 따뜻이 제 길을 배웅해주셨던 월평성당 신자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지막 열흘, 작별 인사를 겸해서 매일 신자분들을 뵈었는데요. 마지막 주일 강론을 하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새 본당에서의 새 생활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세웠던 많은 계획들이 무산되었고 서로 약속하고 함께 다짐했던 일들을 맥없이 놓아 버리며 허탈했던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팬데믹을 핑계 삼아서 마냥 ‘먹고 놀다가’ 떠나는 꼴이었습니다.

수고도 사랑도 한참 미진했다는 생각에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품어주신 본당 가족분들께 감사가 차올랐습니다.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해 올리며 사순 제1주일에 선포되는 입당송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그를 해방시켜 영예롭게 하리라…”는 축복이 그곳에 고스란하기를 손 모아 기도드려봅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그리스도의 세 가지 유혹’ (1481~1482년).

더러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담백하다는 점에 놀랄 때가 있는데요. 오늘 복음이 더욱 그렇습니다. 사탄이 감히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마저도 유혹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사탄의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뻔뻔함을 폭로하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가리지도 않고 갖은 수를 써서 유혹하려 드는 건방지고 돼먹지 않은 사탄의 술수에 걸려들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뿐임을 콕 짚어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백번천번 아니 일평생 한결같이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는 권고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사순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를 예사로 여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지는 ‘아버지 집’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곳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예수님 사랑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온 삶과 온몸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는 참믿음을 채워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일까요?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짜로 그저 쏟아주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방법처럼 자신의 역량으로 쟁취한 성취물이 아닌 까닭일까요? 말할 수 없이 큰 하느님의 은총을 가벼이 여기고 허투루 받아들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지켜 따를 생각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그분의 명령을 ‘따로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작정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본이 되기는커녕 세상을 쫓아가느라고 숨이 가쁜 이유일 것입니다. 세상에 덕을 끼치기는커녕 외려 세상 덕을 보려 하는 못난 삶을 살아가는 까닭일 것입니다.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이러하니, 낯뜨겁습니다.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라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무색할지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로 감히 표현될 수 없을 만큼 벅찬 사랑의 결실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삶을 고민해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만남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생성되어

영혼을 채우는 축복을 놓치지도 잃지도 않아야 옳습니다.

복된 사순 내내, 그분 사랑과 접속하여 사랑의 은혜에 감전되어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 사랑을 ‘알 만큼 아는’ 지혜자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하여 초록색 마음에 희생의 핏물을 들인 사랑의 진수를 살아내시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사순의 시작, 온 세상을 위하여 기쁨과 감사로 고통당하시는 주님께 힘을 보태드리기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라고 원하며 청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