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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7)신자들 만나기 위한 최양업의 사목 여정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2-15 수정일 2022-02-15 발행일 2022-02-20 제 328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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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험한 길… 한 명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5개 도에 걸쳐 있는 127개 공소 관할
2년 동안 3100㎞ 넘는 거리를 순방
도앙골에서 작성한 첫 서한 시작으로
전국 교우촌에서 쓴 14통 편지 통해
신자들 상황과 사목 여정 알 수 있어

최양업 신부가 교우촌을 순방하는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은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충청도에 있는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방문한 뒤 전라도 지역에서부터 사목 순방을 시작했다. 귀국 후 처음으로 서한을 쓴 교우촌은 충청남도에 있는 도앙골이다. 이후로도 최양업은 충청도를 비롯해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의 교우촌에서 14통의 서한을 썼다.

1859년 10월 12일에 쓴 서한에서 최양업은 “저의 관할 구역은 다섯 도에 걸쳐 있고, 공소는 100개가 넘는다”라고 밝혔다. 페롱 신부가 1857년부터 2년간 순방한 거리가 3500리인데 반해 최양업은 같은 기간 8000리를 이동했다고 전한다. 때론 걸어서, 때론 말을 타고 전국의 신자들을 만난 최양업. 조선에 도착한 1850년부터 마지막 서한이 쓰여진 1860년까지 최양업이 걸었던 사목 여정을 살펴본다.

11년간 5개 도 쉬지 않고 오간 최양업

최양업이 순방을 시작할 1850년 당시 조선의 선교사제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전부였다. 따라서 최양업을 포함한 3명의 사제가 조선 전체에서 사목해야 했다. 당시 최양업의 사목 관할 구역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과 인근 경기도 지역, 충청도 내포 지역 일부를 제외한 경기도·충청도 일부, 강원도·전라도·경상도 등 5개 도였다. 1851년 11월부터 진천 배티교우촌(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있던 신학교도 전담했던 최양업은 이듬해 5월 페레올 주교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신학교와 함께 페레올 주교의 관할이었던 경기도 교우촌까지 담당해야 했다.

1850년 말 전국의 공소 수는 185개였고 1851년에 최양업의 사목 관할 구역 안에는 127개의 공소가 있었다. 전국 공소 수의 69% 이상을 담당했던 것이다. 최양업이 만난 신자 수는 1850년 3815명, 1851년 5936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메스트르 신부가 입국한 1852년 이후 최영업의 사목 관할 구역은 크게 축소됐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가장 멀고 위험한 지역의 교우촌은 대부분 그의 담당이었다. 이는 실제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1855년 최양업에게 세례를 받은 어른 영세자는 240명으로, 전체(516명)의 46.5%에 달한다. 1856년 베르뇌 주교,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7년 페롱 신부가 연이어 입국하면서 최양업의 관할 구역에도 변화가 생긴다. 전라도·경상도 남부 지역 대부분과 북부일부, 강원도·충청도 일부, 그리고 황해도의 작은 교우촌으로 축소됐다. 하지만 최양업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과 만나기 위한 위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페롱 신부는 1857년부터 2년간 최양업이 자신보다 2배 넘는 거리를 오가며 교우촌을 순방했다고 전한다. 총 8000리, 지금으로 따지면 3100㎞가 넘는 거리다.

또한 페롱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9월 24일자 서한에서 최양업이 먼거리의 교우촌을 다니기 위해 말을 타고 다녔다고 밝힌다. 전국 곳곳에 숨어사는 신자들과 만나기 위해 최양업은 말을 구해 전국을 바쁘게 달렸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며 마지막 서한을 남긴 천연 석굴 ‘죽림굴’.

서한에 드러난 사목활동지

최양업이 서한을 작성한 곳은 도앙골, 절골, 동골, 배론, 소리웃, 불무골, 오두재, 안곡, 죽림 등 9곳이다. 귀국 후 첫 서한을 작성한 도앙골은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내자면을 가리킨다. 병인박해 때 이곳의 신자 5명이 체포돼 공주에서 순교했으며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등 4명의 시신을 남포 서짓골(현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로 옮겨 안장한 신자들 가운데 도앙골 교우촌에서 거주하는 김순장(요한)이 있었던 것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은 밝히고 있다. 현재 도앙골에는 순교자 135주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최양업이 서한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한 교우촌은 멍에목, 진밭들, 만산리, 간월 등 4곳이다. 11년에 걸쳐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 전국의 교우촌을 순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양업은 1851년 멍에목 교우촌(현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서 조 바오로에게 세례를 준 사실을 서한에 남기는가 하면 만산 교우촌(현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에 대해서는 “이 작은 촌락은 조선의 알프스산맥이라고 할 만큼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있다”고 전한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