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상)

이재훈 기자
입력일 2021-12-22 수정일 2021-12-22 발행일 2021-12-25 제 327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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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선교 위해 파견된 세 주교가 시작

파리외방전교회 본원 모습.

1600년대 프랑스 파리에는 사제와 평신도로 구성된 ‘성체회’라는 신심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성체 형태로 숨어계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고아원, 병원, 본당 등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목했다.

이후 이들의 열망은 파리와 프랑스를 넘어 당시 수도회가 중심이 된 외방 선교, 특히 아시아 지역 선교에 적극 참여하려는 의지로 이어졌다.

성체회 회원들은 이를 위해 1646년부터 10년간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 아시아 지역으로 주교들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마침 최초로 베트남에서 선교하며 아시아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예수회 로드 신부(Alexandre de Rhodes, 1591~1660)도 교황청에 아시아 선교지를 직접 관할할 수 있도록 ‘대목구’ 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1658년 알레산데르 7세(1655~1667) 교황은 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라오스에서 조선에 이르는 3개의 대목구 통킹(Tonking), 코친차이나(Co-chinchina), 남경(南京)을 설정하고, 파견할 주교로 랑베르 드 라 모트(Lambert de la Motte, 1624~1679), 이냐시오 코톨랭디(Ignace Cotolendi, 1630~1662), 프랑수아 팔뤼(Francois Pallu, 1626~1684)를 임명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황은 대목구에 주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할 것 ▲파견되는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풍습을 받아들일 것 ▲중요한 일이 생기면 교황청에 문의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창립자인 세 주교는 대목구로 떠나기 전, 앞으로 선교지에 파견될 후속 선교사의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에 뜻을 모았다. 이어 파리에 설립된 이 신학교는 1663년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43~1715)에 의해 승인됐고, 이듬해 교황청의 공인을 받았다. 이로써 파리외방전교회는 더욱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이라는 주된 목표를 위해 선교지에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1807년 말레이 반도 페낭 섬에 아시아 최초의 신학교가 자리 잡았다. 이곳은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 신학생들을 성직자로 양성하는 아시아 지역 전체의 신학교 역할을 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선교지에 차례로 신학교가 세워졌다. 늘어나는 신학교만큼 현지인 성직자도 1850년 150명을 시작으로 점차 늘었다. 1940년에는 3800명에 달했고 20세기 후반에는 그 수가 더 증가했다.

늘어난 현지인 성직자에 따라 현지인에 이양된 교구도 많아졌다. 1922년 중국 두 곳의 지목구장을 필두로 시작된 현지인 교구 이양은 1990년 안동교구가 마지막이었다.

이재훈 기자 steelheart@catimes.kr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