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나의 꼬부랑 할머니

조희진(효주아녜스·경주 충효본당)
입력일 2021-12-14 수정일 2021-12-14 발행일 2021-12-19 제 327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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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오월의 어느 날 나는 하이얀 이팝나무 가로수 아래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내 뒤에는 다섯 살 먹은 딸아이가 타고 있었다. 아이는 내 등 뒤에서 마냥 좋아했지만 그때 내 마음은 한없이 우울했다. 남편의 잘못된 투자로 벌써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기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절망감과 함께 어쨌든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아파트 전세방을 빼고 변두리 셋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정보지에서 발견한 한 셋방 가격이 눈이 둥그래질 정도로 쌌다. 임자가 나타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야했다. 자전거로 갈 작정이었기에 도중에 길을 물어보지 않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시내를 벗어나 족히 사십 분을 달리다보니 작은 가게들이 도로변에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에서 조그만 동네가 시작되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는 몇 개의 허름한 옛집들이 늘어져 있어서 내가 찾는 집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아이를 내리고 보니, 오래된 잿빛 담벼락을 하얗게 뒤덮은 조팝나무 꽃이 만발한 옆으로 하늘색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손을 잡고 조그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마당에는 손바닥만 한 꽃밭이 있고 그 옆에 발바닥만 한 텃밭이 있었다. 밖에서 본 조그만 대문은 뜻밖에도 꽤 넓은 흙 마당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한옥이었다. 허리가 꼬부라져 몸이 조그맣게 접힌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서 서 계시다가 “뉘 신교?” 하셨다. 그리곤 다짜고짜 “귀가 먹어서 잘 안 들려!” 하신다. 그래서 할머니께 찾아온 연유를 고래고래 소리 지르듯 이야기하고 나서 멋쩍어서 웃었다. 할머니는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젊은 새댁이 방을 보러왔다고 좋아라하셨다.

나는 이곳에서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가 참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았던 것은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할머니께 무얼 좀 가져다 드리려고 할머니 방 미닫이를 가만히 열었을 때였다. 할머니는 온 몸에 아침 햇살을 받고 방바닥에 쪼그려 앉으신 채로 두꺼운 검은 성경책 위로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할머니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기도를 엿듣게 되었다. 기도는 누군가를 호명하며 그의 안녕과 그 가족의 축복을 비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남편과 아이들의 이름과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평생 할머니 셋방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감정이 북받쳤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오는 내 머리 위로 아침 햇살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나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나의 슬픔과 절망이 이 초라한 셋방에서 넘치도록 위로를 받았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는 사실과 하느님이 당신의 꼬부랑천사에게 나를 맡기셨다는 감사와 안도가 눈물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다시 희망을 찾았다.

그런 할머니가 몇 해 전 돌아가셨다. 추석을 보름이나 넘겨 할머니를 뵈러 갔다. 인기척이 없었다. 꽃밭이 휑했다. 댓돌위에 먼지를 뒤집어 쓴 신발이 두 켤레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때 미닫이문에 걸린 자물쇠가 눈에 띄었다. 순간 어떤 차가운 손이 내 등을 서늘히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 도망쳐 나왔다. 손에선 홍시 봉지가 툭하고 떨어졌다. 나는 다만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조희진(효주아녜스·경주 충효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