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혐오의 문화를 넘어서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12-14 수정일 2021-12-14 발행일 2021-12-19 제 327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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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나의 투쟁」은 유다인에 대한 혐오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떤 형식이든, 특히 문화생활의 형식에서 불결하거나 파렴치한 일이 일어났다면, 적어도 거기에 유다인이 관련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종기를 조심스레 절개하자마자 사람들은 썩어 가는 시체 속의 구더기처럼 돌연히 비친 빛에 눈이 부신 듯이 끔벅거리고 있는 유다인들을 종종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진 대로 유다인에 대한 차별은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유럽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일례로 페스트가 창궐했던 중세 시절에 유다인은 재앙을 가져온 원흉으로 지목되기 일쑤였다. 불가항력의 ‘악’에 직면했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맹목적인 눈멂’에 기꺼이 참여하곤 했는데, 고통과 악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처하려는 노력보다 ‘희생양’을 찾아 처벌하는 데 익숙했다. 인류사의 처참한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의 유다인 학살도 ‘악마적인 히틀러’나 그의 ‘맹신자들’의 죄악으로만 보기 어렵다. 홀로코스트(대학살)는 유다인에 대한 공공연한 두려움과 증오가 ‘적’을 만드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인류는 전에 없던 재앙을 겪고 있다. 공포에 휩싸인 국가들이 장벽을 높이는 가운데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점점 더 자라나고 있는 혐오의 문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바이러스 숙주 취급하고 배척하는 현상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죄악의 얼굴이다.

많은 전문가가 얘기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살아야 한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인류는 더 긴밀히 연대해야 한다. 나라와 민족들이 갈라진 채 서로를 두려워하고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구적인 재난에 함께 대응할 수 있는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와 다른 ‘저들’을 타자화하고 희생양으로 규정하는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인류 형제들을 괴롭히는 위기와 고통의 본질을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제5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갈등의 원천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형제적 만남의 문화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형제적 만남의 문화는 우리의 좁은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보편적 형제애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갈라진 세상의 화해를 위해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다. 분열과 증오를 부추기는 두려움의 재난 앞에서 우리 교회가 일치의 소명을 더 잘 실천하기를 기도하자.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