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겨울 꽃밭에서 / 김지영

김지영(이냐시오)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대우교수
입력일 2021-12-07 수정일 2021-12-08 발행일 2021-12-12 제 327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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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 작은 꽃밭에 모과나무 열매 하나가 떨어졌다. 올해도 어김없다.

초겨울, 11월말이 되면 옆집 뒤뜰의 모과나무는 시차를 두고 열매 두 개를 울타리 너머 우리 꽃밭으로 떨어트린다. 집안 탁자위에 갖다 놓으니 금방 은은한 향이 실내에 번진다.

이때쯤, 꽃밭 한쪽의 감나무에는 아직 감들이 달려있다. 내가 절반가량만 따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것들, 새들이 먹던 흔적도 많이 보인다. 감을 딸 때는 마치 내가 자기 것을 강탈해가기라도 하는 듯 깍깍대며 사납게 짖는 까치가 있어 날 웃게 만들기도 했다.

이제 저 감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한번쯤은 제법 많은 눈이 내릴 것이다. 곧 빨간 감들 위로 흰 눈이 소복이 쌓이고, 나는 며칠을 두고 멍하게 그것들을 보고 또 보겠지.

감나무는 가을이 깊어 갈 때 그 잎이 물들면서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낸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도심 주택가 뒤꼍에서 작은 체구로 주렁주렁 열매를 많이도 맺었다. 잎은 또 어찌 그리 고울까. 이파리 하나하나에 온갖 색깔이 다 물들어있다.

어느 순간 이파리들은 하나 둘씩 떨어진다. 아무도, 어떤 힘도 이파리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자연의 시각이 정점에 이른 순간, 시나브로…. 그리고 감은 따기 좋게끔 잘 익어간다. “세상 모든 일이 나뭇잎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이뤄지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벌써 12월 초순도 다 지나가네? 얼른 향나무에 오색등을 달아야겠다. 우리 집 건물 입구의 향나무는 평소엔 마치 보초병처럼 서 있다가 연말이면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장한다.

꽃밭에 떨어진 향나무 포자가 싹을 틔워 성냥개비 만하게 자란 걸 발견한건 10년 전쯤. 화분에 담아 햇볕이 많은 옥상에서 키우다 훨씬 큰 나무화분에 옮겨 심고는 집 앞에 두었다. 무럭무럭 자란 향나무는 진작 내 키보다 훨씬 더 커져 나는 더 자라지 않도록 꼭대기 가지를 잘라 주었다.

이제 세밑 한 겨울밤에 향나무는 오색등불을 반짝이면서 도시의 어두운 골목 구석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작은 꽃밭은 일 년을 마치고 동면의 침묵에 든다.

내가 ‘꽃밭’에 대한 글을 소셜미디어에 가끔 쓰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대단히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집건물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꽃밭은 크기가 매우 작고 햇볕도 잘 드는 편이 아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 나는, 헝클어진 밭에 손을 댔다. 몇 해 동안은 채소를 조금 심다가 꽃을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점 관심이 가는 꽃들을 찾아 심었다. 수선화와 튤립, 수국, 철쭉, 여러 가지 장미, 옥잠화, 맥문동, 작약, 라벤더, 달리아, 칸나, 국화, 샐비어 등등…. 꽃심기를 시작하고 나니 생활 시간표도 변했다. 계절이 바뀔 때보다 더 자주 종로 6가 등 여러 꽃시장을 찾게 됐다. 꽃시장에서 찾는 것은 비단 다 자란 화초나 모종, 꽃씨, 구근 때문만이 아니다. 모종삽과 전지 가위같은 기본적 품목은 물론 좀 더 큰 삽이나 호미, 톱, 물통, 물조리개, 물뿌리개부터 화초 지지대와 감 따기 전용 장대 등 여러 가지 기구와 장비가 필수적이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애정을 쏟으면 그만큼 그 세계의 문은 넓어지게 되나 보다. 나는 재작년, 서울시가 제공하는 3개월 코스의 정원사 교육을 받기에 이르렀다. 내년 봄부터는 1년간의 심화 교육과정을 이수해 정원사 자격증을 따게 되길 고대하고 있다.

꽃을 키우고 애정을 주고, 기쁨을 느끼는 데에 꽃밭이 작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꽃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흙을 만질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꽃밭에는 꽃뿐 아니라 벌, 나비, 무당벌레, 지렁이와 많은 곤충들이 살거나 놀러온다. 자연의 전령인 곤충들도 너무 예쁘다. 꽃과 곤충들의 생김새나 몸짓은 말과 글, 어떤 예술로도 다 나타내지 못하는 표현이며 기호다. 대체 불가능한 생명, 그 아름다움과 힘인 것이다.

지금 차디찬 겨울 꽃밭에는 아무 것도 없이 정적뿐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마치 땅에 금은보화를 묻어놓은 것과 같다. 이 겨울이 지나면 기적처럼, 부활처럼 생명이 살아나고 꽃이 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찰나의 한 편린 위에서 오직 그분의 권능을 경외하며 의지할 뿐입니다.”

※그동안 집필해 주신 김지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지영(이냐시오)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