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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8) 뱅상 레브 신부의 중국 선교와 ‘익세보’

조성일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12-07 수정일 2021-12-07 발행일 2021-12-12 제 327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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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아시아, 꺾이지 않은 펜의 힘… 선교의 새 장 열다

서양 선교사 ‘우월의식’ 벗어나
저술·출판 등 선교방법 제시
1915년 대중 종합일간지 창간
제국주의에 맞서 ‘정필직론’
항일운동 직접 참여하기도

‘익세보’ 창간호. ‘SOCIAL WELFARE TIENTSIN, 1915년(중화민국 4년) 10월 1일, 제1호’로 기록돼 있다. 조성일 신부 제공

뱅상 레브(Vincent Lebbe, 중국명 뇌명원(雷鳴遠)) 신부는 1877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레브 신부는 1888년 그의 나이 11세 때에, 중국 무창(武昌)에서 1840년 순교한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성 페르부아르(Jean-Gabriel Perboyre)의 순교에 관한 글을 읽고 중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레브 신부는 18세 때인 1895년 파리에서 라자로회에 입회했다. 그는 파리 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가 1900년 신학생이었을 때 중국에서는 의화단사건이 발생했고 벨기에인 선교사 하머(Ferdinand Hamer)가 내몽골에서 순교했다. 레브 신부는 건강이 나빴지만 자신의 어릴 때부터의 소망이었던 선교 사명을 이루기 위해 1901년 중국에 갔다.

■ 선교지 중국을 열렬히 사랑한 레브 신부

레브 신부는 선교 방법에 있어서 동양인을 차별하지 않는 동등한 대우, 본국인 사제 양성과 본국인 주교 임명, 선교사들의 선교지역 문화에의 철저한 적응, 서양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해소, 선교지에서의 평신도 지도자 양성, 가톨릭 활동 단체의 조직, 저술 및 출판 사업의 확대 등을 주장하고 요구함으로써 동양선교에 있어 새로운 차원의 선교방법론을 제시하고 실천해 20세기 전반 동양선교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레브 신부는 중국에 와서 먼저 중국어를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고 중국 철학과 중국문화에 관한 지식 습득에 온 힘을 기울였다. 레브 신부는 중국문화 학습에 열정적이었고 중국인의 삶을 이해하고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에 녹아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에 빠르게 중국화할 수 있었다.

그는 천진의 한 성당에서 사목하면서 사람들에 대한 교육과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성정소학(誠正小學), 숙정여학(淑貞女学) 등을 설립해 중국인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공화법정연구소(共和法政研究所)를 설립하고 법학, 철학, 신학 등 학과를 개설해 대사회적 교육 활동에 힘썼다.

■ ‘익세보’ 창간과 성장

레브 신부는 1915년 대중 종합일간지 ‘익세보’ 창간을 준비해 10월 1일에는 창간호를 발행했다. ‘익세보’는 일반 신문으로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신문을 통해 선교를 하고자 발행하게 된 것이다. 1915년 창간 이래 1949년 폐간에 이르는 34년 동안 종교,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익세보’는 중화민국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올곧이 반영했다.

1917년 프랑스가 조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서개(老西開)를 침범해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때 레브 신부의 ‘익세보’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중국의 반(反)프랑스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 때문에 그는 천진교구 두몽(Paul-Marie Dumond) 주교와 갈등을 겪게 됐고 1918년 강제로 유럽으로 송환됐다. 그는 이때 타의에 의해 강제로 송환됐지만 반드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또한 1919년 5·4운동이 발생했을 때 ‘익세보’는 사설과 기사들을 통해 전심전력을 다해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익세보’의 태도는 중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익세보’ 구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대공보’, ‘신보’, ‘민국일보’와 함께 중국 4대 신문에 들어가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익세보’를 높이 들고 신문사 동료들과 함께 신문 발행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뱅상 레브 신부(왼쪽 두 번째).

시민들이 ‘익세보’ 신문사 앞에서 기사를 읽고 있다.

■ 중국교회 향한 레브 신부의 열정

레브 신부는 일시적으로 프랑스에 돌아가 살면서도 중국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프랑스에 돌아가 머무는 동안 중국 유학생들에게 많은 일을 했고 중국인 주교 임명을 위해 교황청을 설득하는 일에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의 결과로 1926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중국인 주교 6명이 서품되는 결실을 보게 됐다. 이로써 17세기에 도미니코회 소속 중국인 최초 주교인 복건성 복안 출신의 나문조(羅文藻, Gregorio Lopez, 1611~1691) 주교가 탄생한 이후 250년 가까이 지나 본국인 주교가 다시 탄생하게 됐다. 1927년에 레브 신부는 중국 국적을 신청해 취득했고 1928년에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1928년 그는 중국 하북성 안국교구에서 손덕정(孫德楨) 주교의 도움으로 성 요한 작은 형제회를 설립했다.

■ 익세보의 항일 운동

1930년대가 되자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 야심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익세보’는 반일 여론의 선봉에 섰다. 레브 신부는 ‘익세보’ 사장으로서 미국 콜럼비아대학 역사학 박사학위 소유자인 나륭기(羅隆基)를 파격적인 대우로 주필로 발탁해 일본의 중국 침략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익세보’ 사장으로서 레브 신부는 주필 나륭기에게 편집과 사설 집필 전권을 위임하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유로이 쓰고 싶은 대로 사설을 쓰도록 격려했으며,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나 탄압에 대해서도 ‘익세보’ 이름으로 적극 방어할 것이라고 했다.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익세보’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장개석 정부의 미온적인 항일태도에 대해서도 강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국민당의 부저항정책을 질책하고 국민당, 공산당 양당의 내전 정지를 호소하면서, 단결해 일어나 함께 일본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익세보’는 일본의 교묘한 탄압과 장개석 국민정부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 직면해야 했다. ‘익세보’는 나륭기 해임 협박을 여러 차례 받았고 암살 테러에 직면하기도 했으며 나륭기는 끝내 ‘익세보’를 떠나야 했다. 그래도 일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계속되자 일본은 ‘익세보’를 없애기로 하고 1937년 8월 정간 조치를 취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다시 발행하기 시작해 5년을 발행하다가 1949년 완전 폐간됐다.

뱅상 레브 신부(오른쪽 네 번째)가 성요한작은형제회 수사들과 함께 산서 항일 전쟁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 항일전쟁 지역에서의 구호활동

레브 신부는 중국에 돌아온 후 줄곧 중국 사랑에 헌신적이었다. 1933년 장성항전(長城抗戰)이 발발한 후 그는 안국 성 요한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하는 구호대를 조직해, 희봉구(喜峰口) 전선으로 가서 송철원(宋哲元) 29부대의 부상군인들을 구호했다.

1937년 전면적인 중일전쟁 개시 후 그는 또 수도회 회원들을 이끌고 산서(山西),찰합이(察哈爾),하북(河北) 등 항일 전쟁지역으로 진입해 화북 전장감독지도단(戰場監督指導團)을 조직하고 장애군인 교육원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구호대를 조직해 구호사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통국(軍統局) 대립(戴笠)의 도움을 받았는데 대립에게 중국공산당 주력군인 팔로군(八路軍)의 활동 정황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1940년 3월 9일 그는 공산당에 의해 국민당의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포로가 됐고 40일 후에 석방됐으나 병을 얻었다. 대립이 비행기를 이용해 중경(重慶)으로 가서 치료하도록 했으나 병이 악화돼 1940년 6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조성일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