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지상의 순례자 되어

조남선(마리스텔라·대구 성김대건본당)
입력일 2021-11-16 수정일 2021-11-16 발행일 2021-11-21 제 3270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순례(巡禮)는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종교마다 장소는 다르지만 거의 모든 종교가 성지 순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이슬람은 순례를 종교적 의무로 정하기도 하고, 우리 가톨릭은 성지와 순례지를 해마다 조금씩 보완해 안내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일 년 전 남편과 한 달간 유럽여행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우리 부부는 순례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여행에서 우리가 주로 찾아다닌 곳이 성당이었고 가는 곳마다 미사에 최대한 참례하려고 노력했는데, 집이나 본당에서 드리는 기도나 미사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 얽힌 성인들의 신앙 이야기와 유해(遺骸), 큰 울림을 전해주는 다양한 십자고상과 성화들이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 때문이었을까.

마지막 여행지인 로마에서는 여행객들이 흔히 들러 간다는 관광지 ‘진실의 입’은 구경도 못하고 5일간을 바티칸과 그 주위를 맴돌며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도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모두 남편이자 나의 영원한 길벗인 가브리엘의 희망사항이었기에.

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주교회의에서 펴낸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구입해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시간을 만들어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다. 솔직히 처음엔 마냥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좋아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칭찬 도장을 찍어가며 선물 받을 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순례 도장 찍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이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지이거나 그분들의 무덤이 있는 곳, 혹은 순교자를 기념하는 성당이나 신앙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기에 이야기로 듣거나 책으로 읽거나 영상으로 접하던 때와는 확실히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분들의 삶과 영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현장이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열흘 전에 다녀온 충남 서산 ‘해미순교성지’는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만도 132명에 이르는 순교지인데 이름 모를 순교자들까지 생각하면 1000명 이상이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한꺼번에 처형한 생매장터와, 한꺼번에 묶어 수장(水葬)시켰다는 물웅덩이 앞에서는 마음이 먹먹해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명(無名)의 순교자들 중에는 어쩌면 미처 세례도 받지 못한 예비자도 있었을 테고, 까막눈이라 성경 한 줄 변변히 읽어내지 못하는 이도 있었을 테고, 더없이 귀했을 성물, 작은 십자가 하나 가슴에 품어보지 못한 이도 있었을 테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목숨보다도 귀한 이름이었으리라.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흙을 맞아가면서 기쁜 찬송을 불렀다는 생매장터에서,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넸다는 옥터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의 음성을 온몸으로 느끼며 천국으로 향했던 참 신앙의 증거를 목격하게 된다.

이제 겨우 3년째인 우리의 순례길은 아직 멀었다. 이제는 도장 찍는 재미가 아닌 진정한 순례의 의미를 조금 알 듯도 하다. 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발끝으로 천천히,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배워가며 앞으로도 이 순례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

순례를 마치면서 드리는 기도처럼 “이 시간을 주님께 봉헌하며 청하오니… 이 세상에 살면서도 늘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의 나그네로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하시고 이 순례의 끝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사랑의 천상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이 순례의 끝에 마련되어 있을 그 잔치에 나아갈 때까지.

조남선(마리스텔라·대구 성김대건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