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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2) 성모의 가수 ‘성 베르나르도’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입력일 2021-11-09 수정일 2021-11-09 발행일 2021-11-14 제 326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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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성모 신심 지닌 천국의 마지막 안내자
신비적 관상에 바쳐진 수도자
관상 안에서 주님께 향하는 영혼의 정감적 운동을 강조
성모께 찬미 노래 바치며 단테의 지복직관 위해 기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사본, ‘천상 장미 옥좌의 성모’(1365년경).

지옥 편에서 단테는 제9 지옥 맨 아래까지 가서야 얼굴이 셋인 악마 대왕 루치페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듯 천국 편에서도 단테는 제9천(天)인 원동천(原動天) 그 너머 지고천(至高天, Empireo)에 이르러서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된다. 사실 「신곡」 전체는 천국 편의 마지막 곡인 제33곡 바로 이 곡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단테는 지고천에 이르러 놀라움과 기쁨 사이에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 세상으로 왔고,

시간에서 영원으로 왔고,

또한 피렌체에서 의롭고 건전한 백성 안으로 왔으니

얼마나 큰 놀라움으로 가득 찼겠는가! (천국 31, 37-40)

그리고는 마치 지상의 순례자들이 그러하듯이, 자기가 본 놀라운 광경을 어서 이승으로 돌아가 전하고 싶어 한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보이지 않고 대신 하얀 옷을 입은 자애롭고 경건한 몸가짐의 한 원로(元老)가 보였다. 클레르보의 대수도원장 성 베르나르도(1091-1153)였다. 베아트리체를 찾는 단테에게 그는 최고 높은 계단으로부터 제3열을 바라보라고 일러준다. 성모 마리아의 자리는 제1열에, 하와의 자리는 제2열에, 라헬의 자리는 제3열에 있는데 베아트리체가 그 옆에 있었다. 관상과 계시가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다. 3이라는 숫자는 9라는 숫자와 함께 항상 신비스럽게 베아트리체와 관련된다. 단테는 자신의 전 여정을 되돌아보며 그녀에게 찬가를 바친다.

오, 내 희망에 힘을 주고

나를 구하기 위해 지옥에 발자취를 남기는 일도

감내했던 여인이여.

(천국 31, 79-81)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통하여

나를 종에서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천국 31, 85-87)

저 멀리 위 영광의 자기 자리로 복귀한 그녀에게 단테가 감사의 말을 전하자, 베아트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까지 예외 없이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경어인 복수 2인칭(voi)을 써왔다. 그러나 지금은 단수 2인칭(tu)을 사용하며 너나들이한다. 이는 그녀가 더 이상 안내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녀는 지금 복자들 사이에 자기 자리를 갖고 있다. 베아트리체는 이제 역사적인 등장인물로 보인다. 또는 영원한 지복 안에 자리한 불사의 영혼으로 보인다.

여기서 새로이 안내자로 나타난 성 베르나르도는 특히 「성모의 가수(歌手)」에서 동정 마리아에 대한 숭경(崇敬)을 보여주었다. 그가 제자인 에우제니오 3세 교황(재위 1145-53)을 위해 쓴 「숙려(熟慮)에 관하여」는 관상(觀想)에 관한 저작으로 단테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왜 천국의 마지막 안내인은 성 베르나르도가 되었을까? 그에게는 두 가지 자격이 있었다. 하나는 성 베르나르도 자신의 특별하고도 강렬한 마리아 신심이다. 성인은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처할수록 “별을 보고 마리아를 부르자”(Respice stellam, voca Mariam)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신비적 관상에 바쳐진 자로서의 그의 명성이다. 특히 그는 하느님께 향하는 영혼의 정감적(affective) 운동을 강조한다. 이는 뒤에 프란치스코회의 신심으로 이어졌다. 성인은 「아가(雅歌)에 관하여」(23,15-16)에서, 자신은 관상 안에서 천국의 평화를 미리 맛보았다고도 말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신학적 체험을 에로틱하게 언어화한다. 그러나 단테는 에로틱한 체험을 신학화한다. 단테의 스콜라적 지성에로의 투신과 사유가 사랑을 앞서고 있다는 주장은 성 베르나르도의 현존으로 균형을 잡는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며 단테에게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는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도한다.

동정녀 어머니여, 당신 아들의 따님이여,

어느 피조물보다도 겸손하시나 가장 높으신 분

영원하신 뜻이 확정된 과녁이시여. (천국 33, 1-3)

성 베르나르도의 기도는 대조법 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Dei genitrix Virgo), ‘당신을 창조하신 분을 낳으셨나이다’(genuisti qui te fecit)와 같은 전례용 문체에 속하는 특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리아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겸손하신 분이시기에(루카 1, 46-49; 연옥 10, 34-45) 가장 높으신 분이 되었다. 또한 비천하지만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고귀한 역할을 위해 선발되셨다. 천상 장미 안에서 성모 마리아의 옥좌는 그녀와 함께 기원전(BC)이 끝나고 기원후(AD)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