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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2) 시노달리타스와 세상 읽기 – 질문하는 신앙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11-09 수정일 2021-11-10 발행일 2021-11-14 제 326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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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정직한 질문 던지며 ‘경청’하고, 함께 답 찾아가야
교회, 복음화 사명 수행하려면 ‘시노달리타스’ 실천 더욱 필요
교회에 진정한 친교 이뤄지고 모든 구성원의 활발한 참여와 상호존중의 대화가 진행돼야
‘경청하는 교회’로 전환 필요
교회가 직면한 문화적 도전과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야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경청과 대화의 문화 형성 중요

2018년 10월 ‘젊은이, 신앙과 성소’를 주제로 열린 제15차 세계주교시노드에서 멕시코 대표 청년(왼쪽)과 한 사제가 의견을 나누고 있다. 시노드적인 교회를 위해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등 교회 구성원 사이에 경청과 대화의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CNS 자료사진

■ 신학적 의제 설정과 교회 현실에 관한 정직한 질문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향한,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교구마다 위원회가 설치되고, 각 교구 차원의 시노드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주변에서 듣고 있다. 교회 안에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고, 그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이 내심 반갑다. 또 하나의 세계주교시노드 행사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교회를 향한 작은 전환점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교회 구성원 전체의 참여를 유발하는 시노드 과정과 교회의 존재 양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청하는 ‘시노달리타스’라는 화두는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시대적 요청을 담고 있는 정확한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지켜나가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이 고맙다. 급변하는 세상과 모든 것들에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욕망의 흐름 속에서, 참다운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공적 담론화해서 새로운 변화를 지향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얼마 전 ‘저널리즘 주간 행사’에서 언론인 손석희는, 언론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사회에 필요한 의제를 설정하고(어젠다 세팅) 그 의제를 지키는 일이라고(어젠다 키핑) 말했다. 교회의 지도자 역할과 좋은 언론의 역할은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노달리타스’는 경청하는 교회로의 전환을 뜻한다. 경청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식별하고자 서로에게, 우리 신앙 전통에, 그리고 시대의 징표에 귀 기울”(「편람」)이는 것이다. 성령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당연히 요청되는 일이다. ‘시노달리타스’라는 의제가 설정된 이유는 교회 구성원들 간의, 교회와 세상 간의 경청과 대화에 대한 강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경청과 대화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서술,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기 위해 요청되는 윤리적 태도와 자세에 관한 담론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교회 구성원들 간의 경청과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오늘의 교회는 세상과의 경청과 대화, 즉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고 식별하고 있는지? 본당과 교구라는 현실 교회의 장(場)에서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경청과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와 같은, 교회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질문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성령께서 그 여정에 함께하면서 답을 주시지 않을까. 신학적인 설명과 윤리적 당위의 요청만큼 교회 현실에 관한 정직한 질문도 중요하다.

■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 친교, 참여, 사명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면, ‘시노달리타스’는 친교와 참여와 사명이라는 차원을 포함한다. 물론 이 세 차원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친교는 참여와 사명 수행의 여정에서 이루어진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신학적으로 풍요롭고 깊은 의미가 있다. 세속의 친밀성 차원으로 축소 환원될 수 없는 개념이다. ‘교회적 참여’라는 신학적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세속의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작동되는 단순한 참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앙적 참여’는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신앙 감각과 성령께서 신앙인 저마다에게 주신 은총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해서 시노달리타스는 더욱 필요하다.

조금 단순화시켜 말해보자. 시노드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회란 첫째, 진정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교회다. 둘째, 교회 모든 구성원의 ‘참여’가 활발하고 상호존중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교회다. 셋째, 관리와 유지와 지속과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복음화의 ‘사명’ 수행에 온 힘을 쏟는 교회다. 본당, 교구, 가정(교회), 수도 공동체, 다양한 교회 단체들이 시노드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

시노드 과정은 경청과 식별과 참여의 양상을 포함한다. “경청이 공동합의적 과정의 방법이라고 하면, 식별은 과정의 목표이고, 참여는 그 여정이다.”(「편람」) 시노드 과정에 충실한 교회란, 결국 경청과 식별과 참여가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뜻이다. 본당, 교구, 가정, 수도 공동체, 교회 단체들 안에서 경청과 식별과 참여의 모습이 구현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야 한다. 또한, 자기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정직하게 질문을 던지고 겸손하게 답을 찾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 성직주의

시노드적인 교회는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교회다. 솔직히 고백하면, 현실 교회 안에서 신자와 신자 사이에도 경청과 대화의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경청과 대화의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다. 과연 무엇이 성직자와 신자 사이의 경청과 대화를 어렵게 하는가? 교계적 질서와 순명의 논리를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일까? 복음화 사명을 위한 교회적 직무를 위계적 서열과 신분적 차이로 오해하는 문화 때문일까? “식별과 자문과 협력의 공동 작업을 통하여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decision-making)과 사목적 차원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decision-taking)을 구별해야 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직무적 구별이지 서열적이고 신분적인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직주의의 폐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적 차원, 교회적 차원, 성직자 양성과 교육의 차원, 교회 문화의 차원 등 다양한 차원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성직주의라는 이름붙이기(naming) 하나로 모든 문제가 축소환원되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 교회의 장에서 성직주의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이가 용기와 담대함(파레시아)으로 발언하도록 초대되며, 이를 통하여 자유, 진리, 사랑이 어우러진다.”(「예비 문서」)

■ 식별과 세상 읽기

경청은 대화이며 동시에 읽기이다. 경청은 상호간의 인격적 대화이며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읽는 일이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화적 도전과 시대적 흐름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교회 안에는 감정적 경건주의만 활발하고 지성적 식별의 능력이 부재하다고 교회 역사가 마시모 파지올리는 지적한다. 식별을 위한 신앙적 지성뿐만 아니라 세상과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인문사회적 지성이 오늘의 교회 안에 절실히 요청된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