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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1)정치와 신앙 – 존재의 정치적 차원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10-26 수정일 2021-10-26 발행일 2021-10-31 제 326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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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관여와 복음적 대안 제시는 교회의 책임이자 의무
정치, 공동선 추구해야 하는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
정치·경제·사회 모든 영역서 교회는 공적 역할 수행해야
사람과 사람 관계성 안에서 정치는 필연적으로 존재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를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치 방식
신앙인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해야

김희중 대주교가 2018년 9월 4일 서울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일치를위한정치·사회포럼 10주년 기념식’ 중 한국종교인평화회의를 대표해 축사를 하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정치에 관여할 수 있고 정책을 비판할 수 있으며 신앙적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신문 읽기와 뉴스 보기

나에게 신문 읽기는 세상 읽기였다. 학창 시절의 신문 읽기는 지식과 문화적 흐름을 습득하는 통로였다. 신문만 꼼꼼히 읽어도 지식인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첫 본당 신부 시절, 매일 오전 자전거를 타고 가 버스정류소 매점에서 그날의 일간신문 전부를 사 와서 읽는 일은 하루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신문을 잘 읽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잠깐잠깐 접하고 있다. 포털을 통해 제공되는 뉴스를 보는 것도 싫어졌다. 요즘은 신문 사이트에 들어가서 책 소개 기사와 문화 기사와 몇몇 칼럼들만 읽는다. 하나의 신문을 펼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흐름을 총체적으로 읽는 일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뉴스를 접하는 방식도 변했고, 언론이 세상을 읽어내는 역량, 즉 언론의 질도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확한 분석과 정직한 방향 제시의 기사보다, 감정과 욕망을 자극하는 기사가 더 많다. 언론이 사람들에게 건강한 문제의식과 올바른 지향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확산하고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사람들 역시 그저 뉴스를 보고 소비할 뿐이다. 무관심과 불신의 태도로 뉴스를 접하고 있다. 신문을 읽고 세상의 이면을 성찰하는 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현대인은 자기 삶에만 초점을 맞추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타인은 그저 배경과 풍경으로 존재한다.

신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일은 신앙인의 책임이며 의무다. 신앙인은 성경과 신문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 읽기는 점점 어렵다. 복잡해지는 세상의 흐름을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 현대 정치의 풍경과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오늘의 대중은 이념과 가치를 지향하기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더 중요시한다.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와 감정을 이용하고 선동하는 포퓰리즘의 결합은 최악의 정치를 낳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체성의 정치는 부정적인 맥락에서 패거리 정치로 전락하기도 한다. 상대 정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며, 조직력을 갖춘 이익 집단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빈발하다. “정체성 정치의 역학은 사회를 자꾸만 더 작고 이기적인 집단들로 분열시킨다.”(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현대 세계의 문제점은 주로 경제중심주의에서 빚어진 것이다. 물질적 욕망과 이해관계의 다툼에서 야기되는 경제적 갈등이 사회의 전방위적 차원으로 확산된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공동선을 향한 정치적 행위를 압도하고 있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고 경제는 효율 중심의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 종속되고 있다.(「모든 형제들」 177항) 경제적 문제는 경제의 논리로 풀 수 없다.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선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다.(「모든 형제들」 180항) 하지만 오늘의 정치는 자주 희화화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를 혐오하고 싫어한다.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정치적 현실과 현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냉소적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지나친 감정이입과 이념적 자기동일시를 통해 과잉투쟁의 모습을 보인다. 조정과 조율로서의 정치는 사라지고 갈등과 투쟁으로서의 정치만 남아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며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지닌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별한다. 정치란 인간의 공존을 조직하는 실천과 제도의 집합이다. 정치의 전제가 되는 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이다.”(샹탈 무페) 인간 자체는 비정치적일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안에는 정치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정치적인 존재는 없다. 정치는 언제나 관계성 안에서 나온다. “정치적인 것은 사회적 삶의 특정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 사이 그리고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발생적 원칙의 총체를 의미한다.”(클로드 르포르)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 복음화 사명의 정치적 차원

교회는 세상 안에서 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의 복음화 사명은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복음의 기쁨」 176항) 교회는 정치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종교 교역자들이 정당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존재의 정치적 차원’을 포기하지 않는다.(「모든 형제들」 276항) “교회에는 자선 활동과 교육 활동보다 우선하는 공적 역할이 있다. 교회는 인류와 보편적인 형제애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모든 형제들」 276항) “교회는 모든 상황 안에 육화되도록 부름받아 세상 모든 곳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현존하고 있다. 이것이 ‘가톨릭’의 의미다.”(「모든 형제들」 278항)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애덕이며, 고통의 원인이 된 사회적 조건들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애덕이다.(「모든 형제들」 186항)

교회는 언제나 정치에 관여할 수 있고 정책을 비판할 수 있으며 신앙적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문화와 윤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 교회는 자신의 공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정치적 행동(기도를 통한 영적 연대, 인권을 위한 정치적 캠페인과 경제적 나눔을 통한 실천적 연대, 교도권적 선언과 선포를 통한 문제 제기와 사회적 연대)을 장려해왔고, 사회교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공적 신앙 – 존재의 정치적 차원

예수께서 세례 이후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신앙인은 세례를 통해 신앙의 공인(公人)이 된다. 신앙인의 삶은 공적 삶이다. 신앙이 사적 영역에서만, 또는 종교의 장에서만 표현되고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고 수행해야 한다.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는 정치적이다. 그 관계 안에 힘과 권력의 기제가 작동된다는 뜻이다.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 친구 관계, 부부와 연인 관계마저도 넓은 맥락에서 보면 힘의 역학 속에 있다. 다양한 힘의 역학 속에서 관계의 평등성을 추구하면서 조정하고 조율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다. 삶의 미시적 영역에서도 언제나 올바른 정치적 행위가 요청된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복음적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정치 방식이다.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