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5) 급변하는 세계 속 일어서는 중국교회

이장욱(바오로)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소장,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를 마치고,
입력일 2021-10-26 수정일 2021-10-27 발행일 2021-10-31 제 326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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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현지화와 혁신 이뤘지만… 선입견 극복 ‘아직 먼 길’
뱅상 레브 신부, 교회 개혁 주도
교황 교서로 선교 방식도 전환
20세기 초반 교세 확장 결실
서양문물에 대한 반감은 여전

19세기를 유럽 열강의 중국 침탈 시기로 인식하며 반그리스도교 정서가 팽배했던 중국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인 사제와 신자들이 증가하며 교회 발전의 가능성을 보이게 된다. 당시 중국 내 교회 개혁을 주도했던 뱅상 레브 신부의 노력과 베네딕토 15세 교황의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 선포는 천주교 중국 현지화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아편전쟁 이래 뿌리 깊었던 중국 내 반그리스도교 정서로 인해 여전히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 중국의 ‘5·4운동’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패배한 독일 등에 대한 전후처리와 관련해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담을 개최했다.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은 연합국으로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산동반도를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이 차지한 것과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하는 불평등조약이 수용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중국의 민심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격렬한 배일(排日)과 ‘반제국주의’ 여론이 형성돼 5·4 운동(五四運動, 1919년 톈안먼 사건)으로 발전하게 됐다.

서방세계의 중국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크게 실망한 중국인들은 5·4운동을 통해 부패하고 무능한 중국의 군벌과 서양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를 외쳤다. 5·4운동은 중국에 변화를 일으킨 사건으로 학생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바뀌고 정치운동의 모습을 띠게 됐고, 또한 중국 지식층들의 사회, 문화개혁을 주도한 ‘신문화운동’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뱅상 레브 신부.

■ 뱅상 레브(Vincent Lebbe) 신부의 공헌

벨기에 출신의 뱅상 레브 신부(1877~1940)는 1901년 중국에 도착한 이래 중국 현지의 천주교 개혁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과 중프전쟁(1884~1885)으로 얻게 된 프랑스 정부의 중국 내 ‘프랑스 선교 보호권’이라는 특권을 레브 신부는 스스로 포기하고, 중국 국적을 선택했다. 그는 오늘날의 천진 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의 현지화와 개혁에 헌신했다.

레브 신부는 다른 서방 선교사들과는 달리 서양의 우월주의를 버리고 중국어를 몸소 배워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교회의 현지화를 위해 천주교의 보편적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중국에서 40여 년 동안 선교 활동에 힘썼다.

중국에서 레브 신부의 업적은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도 ‘익세보’(益世報)를 통해 당시 프랑스 중심의 중국 선교활동과 중국사회 내의 부조리를 비판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중국사회의 ‘신문화운동’과 보조를 맞춰 서방세계와 그리스도교에 실망한 중국인들에게 희망과 개혁의 정신을 고취했다.

레브 신부는 예수회 출신의 마상백(馬相伯, 1840~1939년) 등과 함께 베네딕토 15세 교황(재위 1914~1922년)을 설득해 중국인 사제 임명(1926년)을 관철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중국에서 천주교가 발전하는 데 커다란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1926년 비오11세 교황에 의해 교황청으로 초대돼 주교로 임명된 중국인 사제 6명과 함께 있는 교황청 대표단 사제들. 이장욱 소장 제공

천진 주교에 임명된 폴 뒤몽(Paul Dumond) 신부(계단 아래 가운데)를 만난 뱅상 레브 신부(왼쪽).

■ 교황 「가장 위대한 임무」 공포- 중국인 사제와 신자 수 증가

1920년대 중국 천주교사(天主敎史)의 전환적인 사건은 바로 베네딕토 15세 교황에 의해 공포된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일 것이다.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나면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을 때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뱅상 레브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교활동을 복음적으로 쇄신하고 만민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북돋기 위해 「가장 위대한 임무」를 선포했다. 이것은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과 혼재된 선교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천주교의 선교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서 중국교회사는 이 시점을 전후로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됐다.

20세기 초 중국은 비록 반그리스도교적인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있었으나 중국교회 내에서는 베네딕토 15세 교황이나 뱅상 레브 신부와 같은 교회 개혁자에 의해 선교활동이 서양인 사제 중심에서 서서히 현지 중국인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사제 숫자로도 엿볼 수 있는데, 서양인 사제 수는 1900년대 800여 명에서 1920년대 1300여 명으로 약 1.6배 증가했다. 반면, 1900년대 470명이었던 중국인 사제 수는 1920년대 960명으로 약 두 배가량 증가했다.

의화단사건으로 위축된 1900년대 천주교 신자 수는 70여 만 명이었으나 1920년대 200여 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교세 확장과 신자 수 증가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지난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 서방 선교사들에 의해 꾸준히 쌓여 왔던 선교의 결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반그리스도교 운동’ 등으로 인해 위축된 서양 사제들의 공백을 중국 사제들이 채워 중국 내 현지화된 교회로 발전시킨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 부정적 이미지 극복 못 해

이처럼 괄목할 만한 교세 확장과 신자 수 증가가 있었던 중국교회는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함께한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이미지와 한계가 여전히 존재했다. 그 한계점을 살펴보면, 당시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권을 프랑스가 독점하면서 전체 사제의 70%를 프랑스 출신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당시의 천주교가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 국가와 그 노선을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비치는 것이었다.

5·4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중국의 시민운동은 기본적으로 반제국주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기에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이 포함돼 있었다. 선교활동 과정에서 비록 교육, 병원, 보육원 등의 여러 자선사업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도 했으나, 제국주의를 통해 전개된 그리스도교 선교사업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부정적인 인식으로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초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교세 확장과 신자 수 증가는 고무적인 역사적 사실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사회에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며 중국교회는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선입견으로 인해 1930년대 이후 중국교회는 직면한 여러 위기를 극복하는 데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이장욱(바오로)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소장,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