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능력주의가 아니라 공동선입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1-10-19 수정일 2021-10-19 발행일 2021-10-24 제 3266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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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지루하게 이어지던 가을비가 그치고 하늘이 정말 호수처럼 푸릅니다. 깊은 하늘을 배경으로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맴을 돕니다. 이게 다 코로나19 덕이지 싶네요. 사람들이 극성스럽게 비행기 타고 온 하늘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다니질 못하니 하늘이 저리도 맑은 게지요. 코로나19가 시작된 이래 미세먼지 얘기는 쑥 들어가 버렸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선생님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저 제 한 몸의 편리와 안락, 재미를 위해서 한정된 지구 자원을 펑펑 써 대던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니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못 차리고 백신이나 치료제에 기대서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과연 다음 세대까지 이 세상이 계속될 수 있을지 매우 걱정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그간 못 만났던 옛 친구 둘을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다들 백신접종을 완료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지냈던 한 친구는 지금은 월세 35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혼자 삽니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서 신장 투석도 받습니다. 그동안 처와 자식들이 있어서 기초생활급여를 못 받았는데 법이 바뀌어 부양가족이 있어도 30만 원씩 지급을 받고 여기다가 장애인급여 30만 원이 추가돼 총 60만 원을 받는답니다. 잘나가던 시절 하룻밤 술값도 안 되는 사회보장급여를 받으면서도 친구는 형편이 활짝 폈다고 너무 좋아하더군요.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을 정년퇴직하고 식당 주방에서 하루 8시간씩 설거지를 하며 월 183만 원, 딱 나라가 보장하는 최저임금을 받고 있답니다.

정말 인생무상입니다. 학창시절 꿈도 많았고 남들보다 공부 잘해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친구들은 주제파악을 빨리 마치고 이런 미련, 저런 욕심 다 내려놓은 덕에 노년의 내리막길을 잘 걸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엊저녁 우리 셋은 소주 두 병에 막걸리 네 통을 마감시간인 밤 10시까지 마시면서 촌스럽게도 ‘사회복지의 혜택’에 감사하는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능력주의와 공동선을 주제로 한 글이 실려 있더군요. 10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지요. 그분의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의 내용을 소개한 건데요. 샌델은 능력주의의 오만이 공동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능력주의는 ‘내가 잘나서 성공한 거고 못난이들이 경쟁에서 패배해서 힘들게 사는 건 당연하다’며 이걸 공정한 거라고 여기지만 큰 착각이라는 겁니다.

비싼 과외선생 도움을 받는 학생과 가족을 위해 알바를 해야 하는 학생에게, 공정한 시험의 기회가 부여돼도 그 결과는 정의로울 수가 없다는 거지요. 백번 옳은 말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면 공부하는 능력, 신체조건, 예술적 재능이 세상에 날 때부터 저마다 차이가 나니 애당초부터 ‘공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 출발선이 다른데 능력주의며 공정만을 내세우면 못난이들은 어찌 살라는 건가요. 여기가 ‘공동선’이라는 더 높은 가치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영어도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온 내 친구는 젊은 시절 그 능력에 맞게, 아주 ‘공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제 나이 들어 병들고 집 식구들 떠나가니 무능력자가 돼 공동선이 마련한 사회연금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또 한 친구 역시 최저임금제 덕분에 그릇 설거지하고 183만 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우리 앞집 원룸 건물 주인 할머니는 건강보험료를 올려 돈을 다 뜯어 간다면서 대통령에게 쌍욕을 해 댑니다. 하지만 불로소득인 임대료 받아 낸 보험료 덕에 자신이며 친구 방앗간 할머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도 받고 건강검진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예전에 노동자, 빈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제 삶을 던지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착한 일을 했는데도 감옥에 가고 때론 죽기도 했으니 사실 아주 불공정한 거였지요. 하지만 그들의 공동선을 향한 헌신으로 엊저녁 만난 내 친구들의 노년은 최소한의 기댈 언덕을 얻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터 잡은 능력주의가 아니라 다 함께 사는 공동선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