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지에서 바치는 묵주기도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1-10-19 수정일 2021-10-20 발행일 2021-10-24 제 326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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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 들고 걷다보면 신앙선조와 시공간 초월한 만남
■ 구산성지
천천히 기도하며 걷도록 알맞은 폭의 오솔길 구조
묵주알 같은 둥근 조형물에 다양한 문양이 묵상 이끌어
■ 배론성지
둥근 회양목을 묵주알 삼아 발걸음 옮기며 바치도록 구성
반복되는 오르막 내리막은 명암 교차하는 신앙길 같아
■ 당고개순교성지
풍성하게 핀 꽃들 사이에 돌로 만든 묵주알 놓여 있어
아기 안은 어머니 형상 새겨 성모 마리아의 모성애 느껴져

가톨릭 신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묵주기도. 깊어 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야외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히 순교자들과 신앙선조들의 생애와 발자취가 남아 있는 성지에 조성된 ‘묵주기도의 길’을 찾아 바친다면 어떨까? 성지 순례를 겸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된 성지들을 찾아봤다.

■ 수원교구 구산성지

수원교구 구산성지 묵주기도의 길에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8명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배너가 걸려 있다.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8명의 순교자들이 탄생한 교우촌이자 사적지인 수원교구 구산성지(하남시 유적 제4호)에 들어서면 시원하게 트인 성지 전경 한켠에 ‘묵주기도의 길’이라고 적힌 나무 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 기둥 밑에는 작은 글씨로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헌신과 고통,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거쳐 하느님께 향해 나아가라는 취지의 문구가 적혀 있다.

구산성지 묵주기도의 길은 신자들이 천천히 묵주기도를 바치며 걸어갈 수 있도록 알맞은 폭으로 만들어져 있다. 혼자 혹은 소수 신자들이 기도 속에서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기에 적합한 오솔길 같은 구조다.

묵주알을 형상화한 둥근 조형물에 손을 얹고 성모송을 한 번씩 바치며 천천히 걷다 보면 점점 묵주기도의 깊은 맛에 빠져들게 된다. 또한 둥근 조형물 윗부분에 다양한 모양으로 표현된 십자가 문양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십자가 위에서 받은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도 자연스레 묵상하게 된다.

구산성지 묵주기도의 길 중간 부분을 지날 때에는 김성우 성인과 순교자 8명의 순교행적이 적힌 배너가 세워져 있어 마음이 숙연해지고 순교자들의 신심이 느껴진다. 묵주기도의 길은 김성우 성인 동상이 서 있는 잔디밭에서 끝나지만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며 묵주기도를 바치면 기도의 여운을 체험할 수 있다.

■ 원주교구 배론성지

한 부부 신자가 10월 14일 원주교구 배론성지 로사리오의 길을 찾아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묻혀 있는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 ‘로사리오의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최양업 신부가 남긴 말씀 한 구절이 적혀 있다. 배론성지를 찾은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가질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로사리오의 길은 땅 위에 놓인 십자가 위 예수님을 마주한 뒤 경건한 심정으로 둥근 회양목 한 그루 한 그루를 묵주알 삼아 발걸음을 옮기며 바치도록 구성돼 있다.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을 중심에 두고 성지 둘레를 크게 돌 듯이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각 5단을 바칠 수 있다. 로사리오의 길에서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묵주기도를 바치며 이 길을 걷다보면 부침과 명암이 교차하는 신앙과 인생의 길이 연상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꿋꿋이 걸어가야 한다는 다짐도 하게 이끄는 길이다.

묵주기도를 마치며 바라보게 되는 ‘최양업 도마 신부상’도 오른손에는 묵주, 왼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있다. 로사리오의 길을 순례하는 신자들은 이 모습을 보며 최양업 신부가 신앙을 전하기 위해 굽이치는 길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치던 심정을 시대를 초월해 공유할 수 있다.

■ 서울대교구 당고개순교성지

10월 15일 서울대교구 당고개순교성지 묵주기도 길에서 한 신자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바치고 있다.

‘박해의 칼 아래 피 흘린 목숨보다/ 더 붉게 타오른 님들의 사랑은/ 이제와 영원히 찬미 영광 받으소서!’

서울대교구 당고개순교성지 ‘묵주기도 길’에 들어서면 먼저 이해인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시 ‘당고개 성지에서’가 새겨진 시비가 신자들을 맞이한다.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 홍병주 베드로 등 성인 9명과 복녀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당고개성지 역사를 묵상한 후에 묵주기도를 바치면 순교자들의 뜨거운 믿음을 배울 수 있다.

아담한 공간에 조성된 당고개순교성지 묵주기도 길에는 돌로 만든 묵주알이 놓여 있다.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꽃들도 풍성하게 피어 순례객들이 묵주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시 멈춰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끄는 듯하다. 묵주기도 길과 그 주변을 에워싼 고층 아파트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도 한데 돌 묵주알 하나 하나에 손을 얹고 기도를 바치다 보면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도 신앙은 변치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은연 중 느낄 수 있다.

묵주알 위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이 표현돼 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던 모습과, 성지에서 순교한 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복녀 이성례 마리아가 피끓는 모정으로 어린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결단 앞에 순례자의 마음은 숙연해진다.

묵주기도 길은 계단을 따라 이어지다 하늘정원에서 마무리된다. 하늘정원 둘레 벽에 그려진 당고개순교성지 순교자 10명의 벽화를 묵상하면서 묵주기도를 계속 바친다면 순교신심을 다지는 시간도 보낼 수 있다.

당고개순교성지 묵주기도 길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10월 중에는 평일 낮 12시~오후 4시, 토요일과 주일 오전 9시~오후 4시 개방한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