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89) 사랑, 그대로의 사랑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
입력일 2021-10-12 수정일 2021-10-12 발행일 2021-10-17 제 326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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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최근에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진행했던 일에 대해 좋지 않게 이야기를 했는데, 조언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 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천주교 신자이고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활동도 하는 사람이어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봉사 활동도 많이 하면서 어쩜 저렇게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잘났음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저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저렇지는 않은데…. 그에 대한 분노와 경멸감이 올라왔다.

그러다가 묵상 기도를 하면서 다음 구절에 머물게 되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베드로가 뭐라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큰 권한을 주신 것일까. 하늘나라를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인가. 그런데 그런 일을 베드로에게 맡기신다니, 예수님은 정말 그가 그런 일을 할 자격이 된다고 믿으셨던 것일까. 예수님만이 볼 수 있는 그의 빛이 있었던 것일까? 그게 뭘까,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려 주셨다는 말씀이 다가왔다. 베드로가 능력이 있거나 똑똑해서, 착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느님이 그를 선택하셨고, 그래서 예수님도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신 것으로 느껴졌다. 베드로가 한 것은 그냥 예수님 부르심에 응답한 것뿐이었다. 오늘날 채용 면접처럼 이것저것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하느님이 불러서 베드로가 답한 것이다. 베드로만의 특별한 빛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큰일을 맡기신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또한 비슷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세례받기로 선택했거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혹은 우리가 최소한의 선함이 있거나 기본적인 인품을 갖춰서도 아닌 것 같다. 그냥 하느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는 그저 응답한 것이고, 그게 다다.

그렇게 마음이 흘러가자 나의 착각과 겸손하지 못한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착실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게 아닐까, 만약 그러지 못하면 좀 덜 사랑받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착각과 오만함이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 그것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는 곧이어 예수님께 엄청 욕을 먹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당신께 걸림돌이 된다고,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혼이 났다.(마태 16,23) 베드로가 뭔가 특별하고 더 거룩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늘나라에 대해 알려 주시고, 이 땅에 하늘나라를 만들자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 때로 인간적인 것만 생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사탄 같은 짓을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놀랍도록 큰 사랑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받은 그대로의 사랑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닮도록 애쓰는 것,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 응답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