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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7) 최양업, 현양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10-05 수정일 2021-10-05 발행일 2021-10-10 제 326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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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교자들 삶과 신앙실천의 길 명확하게 기록·정리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청원서 프랑스어 원본을 라틴어로 번역
청원서로는 부족했던 순교자 행적 증언 등 토대로 의미 정립 나서
순교 사실 증명에만 그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한 신앙 생활 조명 

지난 2013년 한국순교자현양회 회원들과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한 뒤 첫 사목서한을 썼던 도앙골성지를 찾아 기도하고 있다. 뒤로는 ‘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가 보인다. ‘鐸德 崔良業 諡聖祈願碑(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라고 한자로 새겨진 기원비는 높이 약 7.5m(비석 머리 포함)로 비신(碑身, 비석 몸체), 비석 머리, 비석 받침 등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회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활동의 정점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라 할 수 있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 행적을 공적으로 확인하고, 교회 공동체가 순교자들을 공적으로 현양하고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따를 수 있도록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한국교회의 순교자를 시복하는 첫 과정에 참여한 주인공이다.

■ 조선 순교자 시복 첫 단추를 꿰다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프랑스어로 기록하여 보내주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페레올 주교님도 원하시고 메스트르 신부님도 권하시므로 제가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최양업은 1846년 순교한 동료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소식을 듣고 비통함에 빠져있었다.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이 슬픔을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했고, 저와 조국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가 보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최양업이 그 비통함에 침몰하지 않도록 끌어줬다. 최양업은 이 글에 담긴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위안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이 글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기해박해 순교자 73명과 병오박해 순교자 9명에 관한 행적을 담은 기록으로, 1847년 초에 현석문(가롤로)와 이재의(토마스)가 수집한 것과 김대건이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정리했다. 최양업은 이중 기해박해 순교자 73명의 행적을 번역했고,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의 행적은 메스트르 신부가 번역했다.

최양업이 번역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단순히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물이 아니라 교황청으로 보내는 ‘시복청원서’였다. 이에 최양업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 청원서는 여행 중에 사전도 없이 쓴 것이어서 저의 능력이 너무나 빈약하여 문장도 서투르고 문법에 거슬리는 곳이 많을 것”이라며 “신부님께서 이 정도로 괜찮다고 여기시면, 잘못된 곳을 정정하신 후 드높은 로마교회로 보내주시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최양업이 번역한 시복청원서는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오늘날 시성성과 경신성사성의 전신)에 접수됐다. 교황청은 이 청원서를 바탕으로 1857년 9월 24일 조선 순교자 82위에 대한 조사 심리 법령을 제정하고, 심리를 거쳐 82위 전원을 가경자로 선포했다. 이어 교황청은 1879년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에 장애가 없음을 선포했다. 최양업이 작성한 이 청원서는 조선 순교자 시복을 위한 첫 단추였던 셈이다.

■ 순교자 현양이 우리의 신앙으로

우리나라 순교자를 위한 첫 시복청원서 작성에 함께한 최양업이지만, 최양업은 만족보다는 갈증을 느꼈다. 페레올 주교가 정리한 행적에는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간략하게 쓰여 있거나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었다. 무엇보다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조선 순교사에 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에 최양업은 조선 입국 후 순교자들의 행적을 더 자세히 조사하고자 마음먹었다.

최양업은 1851년 10월 15일 작성한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순교록을 중국에서 처음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신부님들께 그 보고서에 관해 더 정확히 써서 보내드려야겠다고 진작부터 별렀다”면서 “우선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하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려 한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최양업은 자기 가문의 순교자들, 즉 자신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친척 최해성(요한)의 행적을 상세히 조사해 기록했다. 이 기록에는 박해 중 신앙에서 멀어졌던 최경환의 가족이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됐는지, 최경환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애덕을 실천했는지, 이성례가 왜 배교의 말을 했고 어떻게 다시 신앙으로 굳건해졌는지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최양업이 순교자의 행적을 찾는 작업은 시복을 위한 자료조사에 그치지 않았다. 최양업은 앞서 김대건이나 페레올 주교의 서술과는 달리 조선 사회 안에서 순교자들이 맞닥뜨린 상황과 신앙의 위기, 그리고 순교자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를 조명했다. 순교자의 순교 사실을 증명만 한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이 살아간 삶을 통해 신앙실천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최양업은 위의 편지에서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어떤 것은 아예 몽땅 빠졌다”며 “그 이야기(순교자들의 행적) 중에는 신자들의 교화를 위해 재미있고 중요한 것이 적지 아니할 것”이라고 밝힌다. 최양업에게 순교자 현양은 순교자들의 순교행위 자체만을 드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삶을 전해들은 신자들이 그 모습을 본받아 하느님을 따르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김수태 교수(안드레아·충남대 국사학과)는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를 통해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자기 가문의 순교사 혹은 순교자전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순교자전을 서술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하는 문제 해결 등을 통해 이후의 순교자전에 훌륭한 모범을 보여줬다”며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주었던 순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이제 최양업 신부에 의해서 보다 체계화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대전교구 도앙골성지

대전교구 도앙골성지(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금지로 302)는 최양업이 조선으로 귀국한 후 첫 번째 편지를 쓴 곳이다. 최양업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순교자들에 관한 사실을 조사해 편지를 통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