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평화를 위한 묵주기도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10-05 수정일 2021-10-05 발행일 2021-10-10 제 3264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6ㆍ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다수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피난을 가지 않았다. 피난 문제에 있어서 교구별로 긴급회의가 열리기도 했는데, 대체로 주임신부는 본당에 남고 보좌나 특수사목 신부에게는 피난을 권유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광주지목구의 책임을 맡고 있던 브렌난(Patrick Brennan) 몬시뇰도 쿠삭(Thomas Cusack) 신부, 오브라이언(J. O’Brien) 신부와 함께 목포에서 1950년 7월 말에 체포됐다.

공산군이 진주하기 전인 7월 16일에 미 대사관 영사 맥도넬(Mcdonnell)이 주교관이 있던 목포로 브렌난 몬시뇰을 찾아 왔었다. 그는 피난을 떠나라는 대사관의 방침을 전하면서, 미군이 대전과 목포 사이의 서쪽 지방을 방어할 의향이 없음을 알렸다. 이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중심 활동지인 광주, 나주, 목포, 순천 지역이 북한군 점령지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하지만, 브렌난 몬시뇰과 목포본당 주임이었던 쿠삭 신부, 보좌였던 오브라이언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남기로 결정했다.

7월 24일 새벽, 목포에 들어온 공산군은 7월 25일에 쿠삭 신부와 오브라이언 신부를 불러내서 목포 시내를 행진시키는가 하면, 7월 30일 주일미사 때는 신자들의 명단을 요구했다. 결국 명단 제출을 거부한 후 신부들은 연행됐고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며칠 후에 브렌난 몬시뇰과 두 신부는 광주교도소로 이송됐다가 이후 다시 대전으로 이송되는데, 9월 24일 대전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선교사가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미군 포로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육군 중위 알렉산더(Alexander G. Makarounis)는 훗날 체험기에서 포로 생활 중 광주교도소에서 선교사들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억류 경험이 있던 브렌난 몬시뇰은 자신을 ‘상습범’(jailbird)이라고 소개했는데, 알렉산더는 수감생활 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은 선교사들이 사목자로서 포로들을 위로했던 모습을 회상했다.

쿠삭 신부가 공산군이 목포에 들어오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도 목자의 책임감을 지녔던 젊은 신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어머니, 만약에 제가 신자들을 버려두고 떠난다면, 앞으로 다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입니다.” 훗날 아들 신부의 편지를 읽은 어머니는 “내가 거기 있었다면, 나도 같은 얘기를 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묵주기도 성월이다. 묵주기도 성월은 ‘개인과 가정의 성화’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류 구원과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이다. 아직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이 땅에서 십자가 곁의 성모님과 함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