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 조약 맺고 천주교 금지 해제… ‘정치 개입’ 논란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파견 중국 황실에서 영향력 발휘 1844년 10월 황포조약 체결 이후 천진·북경조약 맺으며 선교 보호권 법적 승인 받아 불법 조항 등 외교 문제 비화
“프랑스의 전통적 보호 정책이 극동에서 성립됐다.”
프랑스와 중국(청나라)이 1860년 북경(北京)에서 조약을 체결하자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모니퇴르’(Le Moniteur)가 1861년 1월 11일자에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 보호권이 국제법적으로 보장받았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프랑스가 중국에서 천주교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됐음을 뜻한다. ■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Padroado) 일찍이 동방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은 알렉산델 6세 교황으로부터 동아시아에 대한 천주교 선교 보호권을 부여받았다.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은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의 교회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및 십일조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에 근거하면, 교황은 단지 포르투갈 국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선교 사무를 관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점차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됐고, 교황청에서 1622년 포교성(布敎省)을 설립해 아시아 선교지에 대목구(代牧區)를 설치하고 직접 포교성에 속한 주교를 파견해 관리하고자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선교 보호권을 둘러싸고 17세기 내내 교황청과 포르투갈 왕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됐다. 17세기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정치적·경제적 교두보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던 포르투갈은 기껏해야 중국으로 오는 선교사를 마카오에서 제지함으로써 그들의 선교 보호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후 1838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인도와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을 취소했고, 1857년 교황청과 포르투갈은 마카오교구만 포르투갈이 보호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선교 보호권 ‘성립’
라그르네의 요구로 이뤄진 천주교 금지 해제에 대한 황제의 명령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사실 프랑스 ‘오랑캐’들을 구슬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황제의 명령은 국내법이기 때문에 프랑스 측에서도 무조건적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주교 금지 해제가 황제의 명령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박해는 여전히 중국 전역에서 행해졌다. 마침내 1856년 프랑스 선교사 샵들렌느(A. Chapdelaine)가 광서(廣西)성 서림(西林)에서 살해되는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에 참여했다.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인 1858년 천진(天津)조약과 1860년 북경(北京)조약 체결로 내지(內地, 중국내륙) 여행의 자유와 함께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국제법적으로 인정됐다. 또한 과거에 몰수된 천주당 및 교회재산을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교부’해야 하고, ‘프랑스 선교사는 각 지역에서 자유로이 토지를 사거나 빌려서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내용이 조약에 명시됐다. 특히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교부한다’는 말은 프랑스가 천주교 선교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중국이 법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불평등조약 속에 있는 ‘신앙 자유’ 그런데 프랑스와 중국이 체결한 북경조약에 불법적인 조항이 있다는 것이 나중에야 확인됐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 선교사는 각 지역에서 자유로이 토지를 사거나 빌려서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규정이었다. 이 내용은 프랑스어 조약본에는 없고 중국어 조약본에만 있는 조항이다. 어떻게 국가 간 조약 내용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인가?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조약 체결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프랑스 선교사 들라마르(L. Delamarre)가 임의로 중국어 조약본에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내지(內地) 부동산 조매권(租買權)’으로 알려진 이 조항으로 인해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로이 교회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됐으나, 이를 둘러싸고 중국 지역사회에서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그동안의 힘든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낸 중국 천주교는 이제 조약의 보호 아래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펼 수 있게 됐지만, 조약이라는 국제법적 보호의 명분 아래 정치적 요소가 개입돼 많은 문제점이 야기됐다. 참된 그리스도 신앙을 위해 묵묵히 선교에 임했던 많은 선교사들이 이제 반그리스도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지역사회에서 종교적 분쟁이 아니라 서양 열강이 간섭하는 등 항상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