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전교의 전진기지–마카오(홍콩) 대표부, 상해와 지부 항구 등
파리 외방 전교회 마카오 대표부(1847년에 홍콩으로 이전)는 조선대목구와 프랑스 본부의 연락을 중계하면서 조선대목구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는데,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운영해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천주교가 탄압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선교사제들이 조선 입국을 준비하는 전진기지가 필요했다. 육로와 해로로 연결된 중국 지역에 그 거점이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Maubant) 신부는 당시 프랑스 라자로회의 전교 거점이었던 서만자(西灣子, 현 하북성 장가구시 숭례현)를 조선 입국의 출발지로 삼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도중에 병사했지만, 모방 신부는 변문(邊門, 현 요녕성 단동시 변문진)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1840년 말 페레올(Ferréol) 신부는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 현 길림성 장춘시 녹원구)에 거처를 잡았다. 1843년 페레올 주교가 제3대 대목구장이 되자 소팔가자는 조선 파견 선교사제들의 거점이 됐다. 여기서 김대건과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았고, 메스트르(Maistre) 신부가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이용해 상해(上海)에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데리고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선교사제들은 해로를 통해서만 조선에 들어오게 됐는데, 배가 출발하는 주요 항구가 1842년 남경조약 이후 개항한 상해였다.
당시 상해에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제들이 전교활동을 했는데 조선 선교사제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최양업은 상해의 예수회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고, 1849년 강남대목구장인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852년 메스트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할 때에는 예수회 엘로(Helot) 신부가 직접 중국 배를 구해 고군산도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60년 이후 산동과 요동의 항구가 개방되자 지부(之罘, 현 산동성 연태시 지부구)는 조선과 중국을 잇는 항로 중 가장 짧은 경로의 출발점이 됐다. 지부는 조선 입국 전 샤스탕(Chastan) 신부가 사목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과 가까운 해안가에 위치한 차쿠(岔溝, 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는 최양업 신부가 입국하기 전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66(병인)년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했던 선교사제와 새로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제들이 차쿠에 모여들었다.
제6대 대목구장 리델(Ridel) 주교는 1869년 초 만주대목구장 베롤(Verolls) 주교와 협의해 차쿠 지역의 사목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차쿠에 조선대목구 대표부가 설치됐고,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으로 불리는 차쿠성당은 조선 입국의 거점이 됐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선교사제들은 1876년 차쿠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리델 주교는 강화도조약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일본을 통해 선교사제를 입국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결국 1881년 대표부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전됐고, 남아 있던 선교사제들이 차쿠를 떠나면서 조선대목구의 사목관할권은 자연 소멸됐다. 1885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Blanc) 주교는 더 이상 해외 거점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나가사키의 조선대목구 대표부를 폐쇄했다. 1886년 조불조약이 체결되면서 기나긴 ‘박해의 시기’는 끝났고, 중국교회의 지원 없이 조선대목구는 전교와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면서 발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