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순교성지에서 바치는 순교자의 길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8-31 수정일 2021-09-01 발행일 2021-09-05 제 326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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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현장에서 박해시대 순교자들과 함께 기도
■ 해미국제성지
족쇄형 큰 칼 본 딴 야외 14처
칼 원형 구멍에는 판화 넣어
순교자와 그리스도 수난 묘사
■ 손골성지
성 도리·오매트르 신부 등
손골 교우촌 순교자 7처 조성
유해와 서한·유물도 전시
■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지하 역사박물관 로비에 설치
고문·처형 도구 실제 크기 표현
박해와 수난 극명하게 드러내

순교자 성월을 맞아 성지순례를 할 때 신자들이 많이 바치는 기도 중 하나는 십자가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 순교자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 형식을 빌려 국내 여러 성지들이 특별히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순교자의 길을 조성해 눈길을 끈다. 이번 순교자 성월에는 십자가의 길과 더불어 순교자의 길 위에서 기도하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수난과 순교를 묵상해보면 어떨까.

■ 대전교구 해미국제성지

대전교구 해미국제성지 전경. 이곳에 설치된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서산 해미 지역 순교자들의 수난도 묵상할 수 있도록 한다.

대전교구 해미국제성지(전담 한광석 신부)에 설치된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서산 해미 지역 순교자들의 수난도 묵상할 수 있도록 순례자들을 이끌어준다.

해미국제성지 14처는 조선시대 죄수 목에 채우던 족쇄형 큰 칼 모형을 본 따 제작됐다.

화강석으로 된 14처는 조선시대 죄수 목에 채우던 족쇄형 큰 칼의 모형을 본 딴 형태로 제작됐다. 칼의 원형 구멍 부분에는 각 처의 내용을 판화로 조각해 끼워 넣었다. 판화에는 성지 마당 안쪽을 향한 면에 해미 지역 순교자들이 겪은 수난이, 바깥쪽에 그리스도의 수난이 묘사돼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모습과 함께 순교자들이 살아가던 조선시대의 모습을 재해석해 담아내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순교자들의 수난도 함께 묵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14처는 ▲감옥에서 의연한 순교자 ▲사형언도를 받는 순교자 ▲호야나무에 달린 순교자 ▲가족의 울음을 듣는 순교자 ▲사형길에 함께 가는 순교자 ▲저주를 달게 받는 순교자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교자 ▲하수구에 내쳐진 순교자 ▲자리개질 당하는 순교자 ▲생매장 길로 가는 순교자 ▲진둠벙에 내쳐진 순교자 ▲산채로 묻히기 전 순교자 ▲구덩이에 들어간 순교자 ▲산 채로 묻혀 버린 순교자 등의 순으로 구성됐다. 각 처에는 해당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기도문도 적혀 있다.

14처의 내용은 한국교회 모든 순교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해미 지역 순교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더욱 눈길을 끈다. 14처 중 등장하는 호야나무는 해미읍성에, 진둠벙은 해미국제성지에 보존돼 있어 기도를 통해 묵상한 순교자들의 수난 현장을 직접 순례할 수도 있다.

해미 지역에서는 조선시대 박해기간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당시 조정에는 해미 진영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처형됐다고 보고 됐지만, 실제로는 수천 명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 수원교구 손골성지

수원교구 손골성지 전경. 이곳 ‘순교자들의 길’은 손골 교우촌과 관련있는 선교사와 무명 순교자 등을 기억하는 7처로 이뤄져 있다.

수원교구 손골성지(전담 이건희 신부) 성당 옆 마당에 조성된 ‘순교자들의 길’도 손골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생명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공간이다.

손골성지 순교자들의 길 제1처.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순교자들의 길’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 ▲성 베르뇌 시므온 주교·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성 위앵 루카 신부 ▲이름이나 행적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 ▲무명 순교자들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 ▲고향이 북한인 성인들-성 정국보(프로타시오)·유정률(베드로)·우세영(알렉시오) 등 7처로 이뤄져있다.

성지는 박해시대 작은 교우촌이 있던 자리로 박해시기 선교사들이 머물며 우리말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풍토와 문화를 배우며 적응하던 곳이다. 이에 성지는 특별히 손골 지역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순교한 도리 신부와 오매트르 신부를 비롯해 손골과 관계있는 선교사들을 현양하고 있다.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길’에서 기억하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된 ‘순교자들의 방’과 성인들의 서한과 유물이 전시된 ‘손골기념관’이 있어 기도와 순례를 함께할 수 있다.

성지는 ‘순교자들의 길’에서 바칠 수 있는 기도서도 비치해 순례자들이 ‘순교자들의 길’에서 성지가 현양하는 성인들과 103위 성인, 무명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기도서를 활용하면, 성인의 약전과 성인이 생전 쓴 글이나 관련된 묵상글도 읽으며 기도할 수 있다.

■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현양탑에서 신자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곳은 한 장소에서 가장 많은 순교 성인과 복자가 난 성지다.

해미국제성지와 손골성지 순교자의 길이 특별히 각 지역의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묵상하도록 돕는다면,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담당 원종현 신부) 순교자의 길은 조선의 모든 순교자들을 묵상하도록 인도한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순교자의 길 제2처. 순교자를 고문, 처형했던 도구를 표현했다.

이경순(바울라) 작가가 만든 순교자의 길은 성지 지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로비 왼쪽 벽에 설치돼 있다. 청동 부조 작품인 순교자의 길은 조선시대에 순교자를 고문하고 처형했던 도구들을 실제 크기대로 표현해 순교자들이 겪었던 박해와 수난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또 작품 뒤쪽으로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조성해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꺼뜨리지 않았던 희망의 빛을 표현했다.

순교자의 길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의심 없는 믿음 ▲움직일 수 없는 두 손 ▲피할 수 없는 구속 ▲한 끼의 기도 ▲후회 없는 삶 ▲슬픔 없는 천국 등 7개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성지 순교자의 길은 앞서 두 곳의 성지처럼 정해놓은 별도의 기도문은 갖추고 있지 않다. 다만 각 작품마다 설명과 묵상글을 달아 작품 감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순교자들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 장소에서 가장 많은 순교 성인·복자가 난 곳으로 교회사적으로도 의미 있다. 이곳에서 생명을 바친 순교자 중 성인은 44위, 복자는 27위다. 성지는 아직 시복시성되지 않은 30위의 순교자도 함께 현양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