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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1) 황실 궁정화가 카스틸리오네

김미선(요안나) 한국교회사연구소 번역팀 연구원
입력일 2021-08-24 수정일 2021-09-08 발행일 2021-08-29 제 325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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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로 전한 ‘주님의 사랑’ 그 어떤 수식어보다 강렬했다
황제 3명과 쌓은 50여 년 우정
신앙의 관념을 예술 통해 소개
금지령으로 끝내 성공 못했지만
닫혀 있는 전통화법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로 시선 돌리게 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지인들은 ‘목수의 아들’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기득권자들은 ‘선동꾼’이라며 두려워했다. 더러는 ‘요한 세례자’라고, ‘엘리야’라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는 베드로다. 그의 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세웠고, 지켰고, 넓혔다.

카스틸리오네 ‘백준도’(百駿圖, 1728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동물화 중 대표작, 물속 그림자마저 출렁인다.

카스틸리오네 ‘아옥석지모탕구도’(阿玉錫持矛蕩寇圖, 1755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아유시가 창을 들고 적을 소탕하는, 역동성이 돋보이는 카스틸리오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 화가와 선교사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했던 예수회 선교 수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S. J., 1688-1766)는 이탈리아인이다. 그는 중국명으로 낭세녕(郎世寧)이라고도 불린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양분된다. 누군가는 그를 화공(畵工)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를 서사(西士)라고 했다. 그의 비문(碑文) 역시 두 개의 언어, 라틴어와 한문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같은 인물을 두고 한쪽은 가톨릭 선교사로서의 투신을, 다른 한쪽은 이방인 노동자로서의 헌신을 조명한다.

이는 억지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를 이길 수 없고, 사회는 교회를 이겨 본 적이 없다. 근세 중국 선교 현장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사시(斜視)는 교회와 사회 간의 관계처럼 유전돼 온 고질병일 수도 있겠다. 각설하고, 카스틸리오네는 출생지보다 선교지에서 훨씬 오래 살면서 세 명의 군주,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옹정제(雍正帝, 1723~1735), 건륭제(乾隆帝, 1736~1795)와 그림을 매개로 50여 년간 우정을 나눴다. 이때의 우정은 서로 다른 꿈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 동상이몽

카스틸리오네는 1688년 밀라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707년 예수회 입회와 동시에 중국 수련 수사로 내정됐다. 그는 성화와 세속화 제작을 병행하면서,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서 선교지로 출항을 준비했다. 1715년 카스틸리오네는 베이징에 도착했다. 당시 중국 황제는 강희제였다. 강희제는 하느님을 ‘상제’로 부르지 못하게 하며 제사를 미신 행위로 단죄하는 교황청의 입장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회화를 사랑했다. 강희제는 수사 화가 카스틸리오네를 초빙했고, 첫 대면에서 그를 시험하고자 새(鳥)를 그려보라고 했다. 강희제는 그가 그려 준 새 그림에 홀연히 매료되고 말았다. 강희제는 그를 황실 화가로 임명했다. 1668년 강희제가 페르비스트 신부를 여러 번에 걸쳐 천문학적 예측에 관해 시험한 후 왕실 천문대 흠천감정(欽天監正)으로 임용한 사정과 겹친다.

강희제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예수회원들의 과학 지식을 활용해 자신의 통치 역량을 강화했다. 반면 예수회원들에게 과학은 하느님 나라를 증명하는 도구였다. 롱고바르도(Niccolò Longobardo S.J., 精華 龍華民, 1565~1655) 신부는 우리가 사는 땅이 공처럼 둥글다는 사실을 지구의(地球儀, 1623)로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증명했다. 평면 지도 위에서 중국은 중앙에 그려질 수 있지만, 지구본 위에서 중국은 중심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전해 주고자 했던 본체는 별자리나 공(球)이 아니라 무형의 공간, 하느님 나라였다. 그러나 그들의 귀에 들려오는 하느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나 걱정할’ 관념의 유희에 불과했다. 관념의 착란을 조정하는 힘은 간혹 감각에서 온다. 관념과 감각을 교환하며 보완하고 전진하는 힘은 예술에서 온다. 카스틸리오네는 회화를 통해 중국인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념의 세계로 중국인들을 인도했다. 그는 이 길이 펼쳐지는 곳곳에 선물을 숨겨 뒀다. 그가 전해 준 선물을 몇 개만 찾아 열어 보자.

카스틸리오네 ‘취서도’(聚瑞圖, 1723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초기 대표작으로 입체감과 음양이 돋보이며, 옹정제의 즉위 축하작이다.

■ 적응 혹은 혼종

취서도(聚瑞圖, 1723)는 시들지 않을 것 같은 꽃들의 향연이다. 카스틸리오네는 즉위한 옹정제를 꽃 그림으로 축복했다. 꽃들을 품고 있는 화병 역시 흡사 숨을 쉬고 있는 듯, 그 질감이 쟁쟁하다. 얼핏 서양화인지 동양화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서양식 화법에 비단과 먹 등 중국의 전통 제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카스틸리오네는 중국의 회화 전통에 ‘적응’했고, 이 적응의 토대에서 그들이 모르는 세계로 인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혹자는 카스틸리오네의 회화 선교를 ‘혼종’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선교 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다. 즉, 주체와 타자의 거리를 뒤섞어 버리는 ‘혼종 콤플렉스’(hybrid complex)가 빚어내는 착시 현상이다. 카스틸리오네에게 회화는 하느님 나라로 시선을 열어 주는 창문 같은 것이었다. 창문의 모습이나 질감, 소재가 아니라 창문이 그 너머에 품고 있는 대상만이 그의 지향이었다.

중국의 전통화는 닫혀 있었다. 어둠이 없으면 빛을 볼 수 없듯, 하여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듯, 그림자가 없는 시각 경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라는 원형적 공간을 관념화하기 어렵다. 카스틸리오네는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구분, 그 경계가 느슨해진 그 자리에 음영과 입체감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을 확보해 주려 했다. 무엇보다 그림 속 사물들이 거느리는 그림자야말로 카스틸리오네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중국인들에게 건네주는 선물이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듯한 꽃의 배면을 흘러가는 그림자와 화병에 아슬아슬 그어진 빗금들의 그림자는 입체감뿐만 아니라 원본과 사본에 대한 구별을 유도한다. 이 변별은 지상의 생명을 유한한 것으로 고백하게 한다. 이 고백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행된다. 황제들의 입교 통로는 이렇게 차분하고 정교하게 마련됐다. 그들의 입교가 임박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창문을 열기만 하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옹정제는 1724년 집권 초기부터 과학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며 가톨릭 금지령을 내렸다.

카스틸리오네 ‘짐의 마음속에는 평화롭게 통치할 힘이 있다’(건륭제 초상, 1737년,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황위에 오른 젊은 건륭제의 초상으로 황제의 얼굴은 그림자 없이 양(陽)으로만 가필됐다.

■ 빛 혹은 그림자

건륭제는 조부 때부터 활약해 온 카스틸리오네의 그림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즉위하면서 카스틸리오네를 자신의 초상화가로 지명했다. 카스틸리오네는 소위 용안(龍顏)에도 ‘그림자’라는 우정의 선물을 예외 없이 전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중국인 화가를 시켜 카스틸리오네가 그려 준 자신의 초상화에서 그림자를 제거했다. 건륭제는 음영을 거부했다. 빛에는 그림자가 없다. 건륭제는 자신을 스스로 밝히는 빛이라고, 스스로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라고 여겼다. 하여 그리스도교 신자가 천자도 아닌데 천주를 모시는 것은, 더더욱 황제에 대해 불경으로 생각됐다.

그는 교회를 박해했다. 선교사 카스틸리오네는 “우리는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황제의 존엄하신 조부 강희제께서도 제국 전역에 이를 전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라며 목숨을 걸고 탄원했지만, 예정대로 선교사들의 사형은 속속 집행됐다. 이후 카스틸리오네는 원명원 건축과 각종 초상화 등을 제작하며 선교 수사로서의 소임에 투신했고 1766년 선종했다.

■ 그는 누구인가?

일본의 막부 시대 ‘후미에’(踏絵)는 글자보다 그림의 힘이 강함을 역설한다. 성화를 밟으라고 겁박하던 이들은 그 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성화 속 그림자를 두려워했다. 그림자를 그려 준 카스틸리오네는 누구인가? 아직 그가 ‘황실 화가’로만 보인다면, 그가 전한 선물들을 다시 열어, 그림자를 바라보자. 글자보다 위대한 그림자의 힘을 느껴 보자.

그 힘에 의탁했던 이들은 조선 가톨릭교회에도 있었다. 정광수 바르나바(?~1802)와 그의 아내 윤운혜 루치아(?~1802) 등은 성화 보급에 힘썼던 순교자요 선교사였다. 그들이 전해 주는 성화에도 그림자가 있었다. 성화와 성상은 알려줬다. 그림자 없는 분은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 한 분뿐임을.

고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ESIT)에서 수학했다. ‘재중 예수회 선교 보고서 Traité sur quelques points de la religion des Chinois, 1768 연구’로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어 사료 오역과 서술 오류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이며 한국교회사연구소 번역팀 연구원이다.

김미선(요안나) 한국교회사연구소 번역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