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산을 오르다 하느님을 만나다] (5·끝) 간월산 죽림굴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1-07-27 수정일 2021-07-27 발행일 2021-08-01 제 3256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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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 기도하기 위해 숨어든 골짜기에는 동굴로 된 공소가… 
경남 밀양과 울주군에 걸친 높이 1000m 영남 알프스 9봉
도보로 2시간여 산길 오르면 박해 시대 신자들 숨어 지내던 ‘천연 석굴’ 죽림굴에 다다라
포졸들이 간월골에 나타나면 신자들 일제히 굴 안에서 은신
‘한국의 카타콤’ 별칭 붙어 
최양업 신부 넉 달여간 지내며 마지막 서한 남긴 장소이기도

죽림굴에서 반시간 남짓 올라가면 간월재 능선에 펼쳐진 억새평원과 마주할 수 있다. 박해 시대 경남 지역 최초의 공소인 간월공소 신자들과 충청도 및 영남 지역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죽림굴로 피신하기 위해서 이 재를 넘나들곤 했다. 사진 박원희 기자

이 여름, 어김없이 폭염 소식이 잇따른다. 각 지역 얼음굴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 절실하다. 마침 이번 호 ‘산을 오르다 하느님을 만나다’ 여정의 중심지는 한국교회 유일의 천연 석굴 공소다. 바위에 뚫린 굴이 공소라고? 언제, 어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석굴을 신앙터로 이용했을까. 16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간월산 죽림굴로 향한다.

■ 최양업 신부 마지막 편지를 쓰다

“…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 그 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 - 1860년 9월 3일 조선교구 사제 최토마 올림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를 피해 죽림굴에서 숨어 지내며 마지막 서한을 남겼다.

해마다 수천 리를 걸어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했던 최 신부의 발걸음은 경남 울주군 상북면 억새벌길, 바로 간월산 허리춤에 자리한 죽림굴(대재공소)도 비켜가지 않았다. 최 신부의 다른 서한 내용에 따르면, 그가 사목을 담당했던 조선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 높은 산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었다. 죽림굴도 최 신부의 말처럼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최 신부는 특히 경신박해(1859~1860년)를 피해 죽림굴에서 넉 달여간 지냈다.

■ 박해 시대 천연 석굴 공소

천연 석굴 공소의 입구는 나지막하다. 게다가 이름처럼 주변은 대나무와 풀이 많아 입구 또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죽림굴 앞에 서니 박해 시대 신자들이 은신하기에 매우 유용했을 것이라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죽림굴에 오르기 위해선 간월산 혹은 신불산 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하는 길을 추천한다.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영남 알프스 9봉’ 중 간월산과 신불산의 푸르름을 누리며 오를 수 있다. 영남 알프스란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에 자리한 높이 1000m 이상 되는 산의 무리를 말한다.

이번에는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쉬운 국립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 하단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초입부터 짙은 나무그늘이 뙤약볕을 가려주고, 흐르는 소리도 경쾌한 계곡물이 동무처럼 나란히 흐르는 길이 뻗어 있다. 계곡 물길을 따라 난 길을 올라 파래소 폭포에 다다른 시간, 묵주기도 5단이 딱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점차 콧노래도 기도도 뒷전으로 밀린다. 돌계단과 데크계단을 비롯해 꽤나 가파른 경사의 돌길이 이어진다. 숨이 차오르자 최양업 신부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되뇌었다는 ‘예수 마리아’가 절로 터져 나왔다. ‘세상사가 힘겨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업고 걸어주셨는데, 그럼 이 산길에선 내가 예수님을 한 번 업고 걸어볼거나’.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는데 어느 틈엔가 돌길은 끝나고 산기슭을 따라 난 단정한 오솔길에 들어선다. 그렇게 신불산 자락을 지나 간월산 자락에 들어서면 ‘울주 천주교 순례길’ 3코스와도 만난다. 이 순례길의 끝점도 죽림굴이다. 여기서부터는 아스팔트 포장이 깔끔하게 돼 있지만 경사는 꽤나 심하다.

일반 성인의 걸음으로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면 하단 휴양림에서 죽림굴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160~180여 년 전에는 다듬어진 산길과 데크계단도, 다져진 아스팔트 포장도 없는 험한 골짜기 길을, 신자들은 왜 어렵사리 오르고 또 올랐을까. 동행한 기자의 한 마디가 긴 여운을 남긴다. “기도하며 살기 위해 기다시피 하며 올라간 거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더 잘 섬기려고 오른 산. 표지석이 없다면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는 그 산 허리 대나무숲 너머에 죽림굴이 있다. 입구는 성인들의 경우 어지간하면 허리나 머리를 겸손하게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높이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꽤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100~15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석굴은 그들의 기도소리를 기억할까.

박해 시절 이양등(베드로) 복자는 꿀 장사를 하면서 죽림굴 바깥 정세를 살폈다. 포졸들이 재 넘어 간월골에 나타날 때면 신자들은 일제히 굴 안에 숨어 구유에 물과 곡식을 넣어 불려 먹으며 은신했다. 이 석굴 공소에 ‘한국의 카타콤’(catacomb)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죽림굴 순례, 박해 시대 신앙의 끈은 교우촌에서 교우촌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순례 후에는 1시간여에 걸쳐 간월재를 오른다. 능선 너머 펼쳐지는 대자연의 절경과 발아래 펼쳐지는 삶터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신불산으로 넘어가 하산할 수도 있고 다시 죽림굴을 지나 내려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려오는 발걸음에는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늘나라만을 바랐던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과 지금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돌아보는 성찰의 무게가 더해진다.

죽림굴(대재공소) 입구. 사진 박원희 기자

죽림굴 내부 제대. 사진 박원희 기자

울주 천주교 순례길 표지판. 사진 박원희 기자

◆ 간월산 죽림굴과 울주 천주교 순례길

죽림굴은 1840년부터 1868년까지 대재공소로 사용됐다. 하지만 경신박해에 이어 병인박해까지 이어지면서 신자들은 대거 체포됐고 남은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공소는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오랜 시간 잊혔던 죽림굴은 1986년 부산교구 언양본당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죽림굴 안에서 발견된 구유 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은 언양성당 옛 사제관에 조성한 신앙 유물 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언양성당에서는 언양 시가지를 지나 살티공소 등에 이르는 13.11㎞ 구간의 ‘울주 천주교 순례길’ 2코스를 시작할 수 있다. 1코스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 형성한 교우촌을 둘러보는 순례길이다. 아울러 죽림굴을 순례하기 위해서는 상북면 이천리(배냇골)에서 시작해 영남 알프스 자락 3.22㎞를 걷는 ‘울주 천주교 순례길’ 3코스도 추천한다.

순례길에 대한 안내와 가이드북은 언양성당에서 받을 수 있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