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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역사의 치유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07-13 수정일 2021-07-13 발행일 2021-07-18 제 325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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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미24군단과 함께 인천에 도착한 미국 군종교구장 스펠만(Francis Joseph Spellman) 대주교는 다음 날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는 강론에서 미군이 점령군이 아닌 해방자로 온 사실을 강조한다. “내가 이곳에 와 주교와 신부들과 이렇게 많이 모인 교우들을 만나 보게 된 것은 나의 큰 영광입니다… 조선은 이제 해방됐습니다. 미국 국민이 조선의 해방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여러분은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군정 초기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강압적이었다. 맥아더 명의의 포고령 1호를 보면,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8월 15일에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정권이양 교섭이 있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됐지만, 미군은 이를 수용할 마음이 없었다. 당시 하지(John R. Hodge)의 포고문 역시 “주민의 경솔,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 없이 인명을 잃게 하고, 아름다운 국토도 황폐돼 재건이 지체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8·15 해방’ 이후 일본 군경은 상당 기간 물리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미군을 환영하기 위한 한국인의 행진에 발포했으며, 미군 진주 일주일 후에도 도쿄의 도메이 방송국 뉴스가 방송됐다. 일본 군경은 일본인의 재산을 지킨다는 이유로 ‘미군정’ 완장을 차고 거리를 활보했다. ‘미군이 재가한 일본군 파견대’라고 쓴 트럭 역시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미군정의 이러한 조치는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일본인 고위 관리들까지 유임되자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 사령관은 9월 29일 민중을 달래기 위한 포고문을 발표했는데, 그간 미군정이 이룬 ‘성과’로 우선 ‘아베 총독 및 각 국장의 파면, 미군정 하에서 서울 중앙정부가 개조(改組)됐다는 것’ 등 일본인 관리 문제가 우선순위로 언급됐다. 포고문은 또한 ‘경기도는 현재 미군정 하에 있으며 일본인 경찰관이 차차 파면되고 그 대신 조선인 경찰관이 배치되고 있는 중’이라는 치적을 내세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역사의 상처’에 관해서 “역사에는 쉽사리 벗어던질 수 없는 폭력과 분쟁의 무거운 짐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과거의 죄악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일종의 ‘기억의 치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제3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3항) 분열된 세상에서 치유의 소명을 지니는 한국 천주교회가 화해를 위한 성찰에 앞장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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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