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공정’을 넘어서는 ‘아량’을 / 김형태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1-07-13 수정일 2021-07-13 발행일 2021-07-18 제 325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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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뒤편 고즈넉한 부자 동네에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점심 먹고 그 앞을 지나다 보면 녀석은 늘 그늘에 모로 누워 자고 있습니다. 하얀 진돗개를 크게 키워 놓은 모습인데 털이 좀 더 길고 아주 기품이 있어 보이더군요. 그런데 도대체 저 녀석은 자고 있는 건가, 아니면 목줄 길이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으니 하릴없이 누워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건가.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해 옵니다. 쟤는 무얼 하러 태어난 걸까. 평생 3m짜리 목줄에 매여 있으려고? 저 녀석에게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얼까.

우리 집 마당에 기를 쓰고 돋아나는 풀들도 그렇지요. 매일 아침 모종삽으로 뿌리째 떠내 보아도 내일이면 또 여기저기 잔디 사이를 비집고 올라옵니다. 너희들은 나한테 뿌리 뽑히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오는 거니?

하긴 우리네 인생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저 3m 목줄에 다름없는 가지가지 욕심에 매여, 아니 존재 자체가 지닌 여러 한계에 매여 허덕이고 있지요. 우리 집 마당에 돋아나는 풀들처럼 그저 기를 쓰고 나 좀 살아 보자고 아등바등합니다.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공상과학영화가 있습니다. 먼 미래, 사람들은 인조인간들을 만들어 우주전쟁에 써먹습니다. 그들은 사람과 완전히 똑같지만 결정적으로 수명이 딱 4년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인조인간이란 걸 알게 돼 인간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쫓아가 제거하는 게 블레이드 러너인 ‘해리슨 포드’의 임무입니다. 수백 층 마천루 꼭대기, 퍼붓는 빗속에서 마지막 일전을 벌이던 해리슨 포드가 힘에 밀려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 그를 죽이려던 인조인간은 팔을 뻗어 그를 구해 줍니다.

그리고 4년 수명이 다해 죽어 가며 이런 말을 하지요.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 성좌에서 불타오르던 전함들. 탄호이저 게이트에서 어둠 속에 반짝이던 C-빔도 봤지. 그 모든 순간들이 때가 되면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자, 이제 죽을 시간이야.”

비록 4년밖에 못 사는 인조인간이지만 그는 인간의 품성 그대로 만들어졌기에, 자신이 기억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마치 빗속의 눈물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해리슨 포드를 구해 줍니다. 해리슨 포드는 저를 구해 주고 죽어 가는 인조인간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중얼거립니다. “저 녀석이 왜 나를 구해 준 걸까. 마지막 순간에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걸까. 자기 생명뿐 아니라 다른 이들과 저를 죽이려 쫓아다니던 내 생명까지.”

요즈음 ‘공정’이란 단어가 최대 화두입니다. 사람들은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어도 공정하지 못한 건 못 참습니다. 어린 시절 여동생 때문에 종종 어머니에게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둘이 다투면 어머니는 무조건 나를 혼내셨습니다. 오빠인 네가 아량을 베풀어야지 어째 동생과 다투는 거냐. 어린 마음에 나는 매우 억울했지요. 자초지종을 따져서 잘못한 놈이 혼나야지. 요즈음 말로 어머니는 불공정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정을 넘어서는 아량이 필요하다는 걸 차츰 알게 됐습니다.

얼마 전 인천공항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걸 두고 사회가 떠들썩했지요. 야당 대표가 된 한 젊은이는 한술 더 떠서 정글의 무한경쟁이 공정을 보장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더군요. ‘실력대로 대접받자.’ 하지만 그 실력이란 게 어디 저 자신이 만들어 낸 거던가요. 그리고 외국 명문대를 나오는 좋은 머리며 부모의 뒷받침을 못 갖추고 난 이들은 경쟁의 정글에서 살 길이 없겠지요.

공정하기로 말하면 인조인간을 제멋대로 수명도 줄여 놓고 전쟁에만 써먹는 인간 해리슨 포드가 인조인간 손에 죽는 게 공정한 거지요. 개보다 머리가 좋다고 개의 한 평생을 목줄에 묶어 놓는 우리 인간의 행동이 공정하다 말 못하겠지요.

인간의 품성을 지녔기에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도 저를 그렇게 만든 인간을 구해 준 저 인조인간처럼, 하느님의 품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도 공정을 넘어서는 아량을 가져야겠지요. 굳이 ‘공정’이란 단어에 목을 맬 거면 이렇게 말을 바꿀 수도 있겠군요. ‘나’ 중심의 공정만 챙기지 말고 나를 넘어선 ‘다른 이들’의 공정도 챙겨 보자고.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