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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다 하느님을 만나다] (2) 감악산 용소막성당과 배론성지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21-07-06 수정일 2021-07-07 발행일 2021-07-11 제 325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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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자연 속에 숨겨진 찬란한 신앙 유산
박해 피해 숨어든 용소막 인근 교우촌 형성되며 경당 세워 1915년에 현 성당 모습 완공
감악산 남쪽에 있는 배론성지 ‘황사영 백서’ 작성된 토굴과 최양업 신부 묘도 볼 수 있어

감악산은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경계를 이루는 해발 945m 높이의 산이다. 보통 감악산으로 불리지만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감악봉으로 돼 있다. 이웃한 치악산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하나로 온 가족과 함께 여유있게 오를 수 있어 등산객에게 인기 높은 산이다. 감악산 자락에는 용소막성당과 배론성지도 있어 등산과 함께 성지 순례를 할 수 있다. 감악산과 함께 용소막성지와 배론성지를 찾아가 보자.

■ 고즈넉한 운치의 용소막성당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구학산로 1857. 감악산 자락 끝에 자리 잡은 용소막성당은 풍수원성당과 원주성당(현 원동주교좌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이다. 고딕 양식 벽돌 건물로 서울 명동대성당을 꼭 빼어 닮은 용소막성당은 1915년 시잘레 신부가 완공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다. 마당에는 수령 150년이 훌쩍 넘은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성당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어 고즈넉한 운치를 더한다.

용소막성당이 위치한 신림면(神林面)은 글자 그대로 신성한 숲으로, 북으로는 치악산, 동서로 백운산과 감악산에 둘러싸여 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수도권에서 두 시간 안팎이면 갈 수 있지만, 옛날엔 그야말로 두메산골이었다. 이 두메산골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 덕분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첩첩산중이던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았다. 이후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신자들이 이사를 왔고, 1898년 풍수원본당 전교회장으로 활발히 전교활동을 하던 최도철(바르나바)까지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됐다. 그는 1898년 대여섯 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열 칸의 아담한 경당을 지었고, 원주본당 관할의 용소막공소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04년 용소막은 본당으로 승격됐고, 교세가 커지자 3대 주임이던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에 나서 1915년 가을 현재의 성당을 완공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성당 또한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원형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에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됐다.

용소막성당 구내에는 본당 출신으로 공동번역 성서 발간에 큰 업적을 남기고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선종완(1915-1976) 신부의 동상과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에는 선 신부가 번역 작업을 위해 사용했던 세계 각국의 성경과 책상, 카메라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다. 성당 뒤편으로는 자그마한 성모 동산이 자리한다. 동산에 오르는 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로 둘러싸인 용소막성당.

■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안식처 배론성지

감악산은 남쪽으로 충북 제천시 봉양읍까지 이어진다. 봉양읍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설립된 곳이자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배론성지가 있다. 계곡이 깊어 배 밑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는 성지는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성지 입구에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탁사정(濯斯亭)이 있다. 이는 제천시가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수려한 자연 경관도 ‘한국의 카타콤바’라고 불릴 만큼 풍성한 성지의 신앙 유산에 견주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에서는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가 명주 자락에 1만3384자로 자신의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를 썼고, 황사영이 백서를 쓴 옹기 토굴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가경자 최양업 신부 또한 이곳에 묻혀 있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8개월 동안 배론의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다. 백서에는 신유박해의 진행과정과 순교자 열전,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등이 적혀 있다. 현재 백서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배론성지 토굴에는 백서 복사본이 전시돼 있다.

성 요셉 신학교는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당시 배론 교우촌 회장이던 장주기 성인이 자신의 집을 신학교 교사로 봉헌했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 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눠 진행했다. 신학과에서는 수사학과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두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다. 성 요셉 신학교는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다.

배론성지에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묻혀 있다.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 신부는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며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등 전국 5개도 127개 공소를 걸어다니며 사목활동을 펼치다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졌다. 성 요셉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유해는 배론에서 약 70㎞ 정도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 묻혔다가 5개월가량 지난 후 11월 초 배론 성 요셉 신학교 뒷산으로 이장됐다. 배론성지 십자가의 길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최 신부의 묘소를 만날 수 있다.

계곡이 깊어 배 밑바닥 같다고 붙여진 배론성지 입구에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탁사정이 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8개월 동안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주교에게 박해 과정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사진은 황사영 토굴의 모습.

■ 순례와 함께 감악산 오르기

감악산은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짧고 경사도 완만해 산행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산행기점은 백련사다. 백련사에서 감악산 정상까지는 30여 분 걸린다. 하산할 대는 885봉, 요부골을 거쳐 비끼재로 내려가는 길과 재사동으로 내려가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비끼재를 따라 좀 더 내려오면 가나안농군학교 앞에 이르고 학산리 인근 국도로 나오게 된다. 학산리에서는 국도 건너편 구릉에 있는 용소막성당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