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피흉(避凶)

채정순(아녜스·대구 두산본당)
입력일 2021-07-06 수정일 2021-07-06 발행일 2021-07-11 제 325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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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용하다고 소문난 소녀 무당이 불쑥 내 집에 와서는 정월달에 이 집에서 시체가 나가겠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가리사니를 잃고 처방할 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다. 무당은 이 집은 망토 입은 여자가 감싸서라고 얼버무리더니 가 버렸다. 무당의 말을 더듬어 가다가 며칠 전에 친정 갔을 때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정초가 되면 자식들의 신수를 보고 나쁜 운이 낀 자식을 위해 부적을 사 오신다. 그날 역시 삼재 부적을 형제들에게 나눠주며 내게도 주기에 나는 ‘성당!’ 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는 “너네는 삼재가 셋이나 들었는데”라며 성당에 매일 가서 열심히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혼자가 되면 무당의 말이 신경이 쓰여 누가 화살을 맞는다 말인가 하며 중얼거리다가 성당을 달려가거나 십자고상과 성모상 앞으로 다가가 기도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설을 거꾸로 쇠었는지 세찬 바람이 눈발까지 몰고 왔다. 바람 설거지를 하려고 현관문을 여니 잘 열리지 않아 힘껏 밀치고 보니 털이 알록달록한 고양이가 집안 쪽을 향해 점잖게 앉아있었다. 사람을 봐도 달아나지 않아 의아해 쳐다보니 크기가 양 만한 게 산신령을 느끼게 하는 늙은 고양이었다.

혼자 보기가 아까웠지만 추워서 빨리 들어가려고 “가라, 가라” 하며 말로 내쫓으니 놈은 도망칠 의향은커녕 도로 현관 안을 기웃거렸다. 집 뒷산은 야생 고양이 천국이다. 이들은 인기척이 나면 금방 도망간다. 어쩌다 집으로 들어와도 내가 왼발만 슬쩍 굴러도 자취 없이 사라지는데 이놈은 뭔 의식이라도 있는 듯 발을 통통 구르며 가라고 소리쳤지만, 꼼작하지 않았다.

얼른 마당 빗자루를 갖고 와서 슬슬 밀며 쫓았으나 내 힘에 조금씩 밀려갈 뿐 겁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었다. 산과 뒤란의 경계까지 억지로 밀고 와서는 빗자루로 다리를 들어 산으로 보내려 해도 다리를 들기는커녕 집 쪽으로 도로 몸을 돌렸다. 그제야 가관인 놈의 눈을 들여다보니 경계가 전혀 없고 품위와 형이상학마저 느끼게 하는 순한 눈빛이었다. 빗자루로 때려 쫓을까 하던 마음이 눈빛에 압도되어 방으로 들어와 차렵이불을 들고 나왔다. 마음 한편으론 자리를 비우는 사이 달아나길 기대했지만, 놈은 붙박인 양 그대로 있었다. 당당히 남아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이불로 덮어주는데 갑을 대하는 을처럼 내가 쩔쩔맸다.

자리에 누웠어도 달관한듯한 그 눈빛이 떠올라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깜박했는데 희한한 꿈이 찾아왔다. 저승사자가 딸 방에서 딸을 안고 나오기에 내가 안 된다고 소리치니 놓아버리고 이제는 남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엎어지고 넘어지며 남편과 딸을 잡아당겨 십자고상과 성모상으로 끌고 갔다. 그제야 안 되겠다 싶은지 저승사자는 밖에 나가 어떤 물체를 허리춤에 차고 황망히 사라졌다.

동창이 푸르스름해 뒤뜰로 가보니 눈 맞은 이불만 쓰레기처럼 널려 있을 뿐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어 마당으로 나오는데 보일러 통과 가스통 사이에 얼룩한 뭔가가 끼어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이미 숨이 멎어 축 늘어진 놈의 시체였다. 늙고 병들어 바깥에서 가장 따뜻한 그곳으로 찾아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어젯밤에 고양이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한 일련의 일들이 떠올랐다. 이미 다한 목숨을 우리 가족을 위해 베풀 각오가 되었기에 집안을 기웃거렸던 모양이었다. 그런 진심을 미리 알았다면 현관이 아니라 안방인들 못 내주었으랴! 나는 정말 고마워 눈시울을 붉히며 주검을 정성껏 거두었다.

현몽으로 보아 이 구원자는 하느님이 마련해준 선물이 분명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할 때 순종의 마음을 읽은 하느님께서 미리 재단 앞에 숫양을 보냈던 것처럼, 또 무당 소녀가 말한 망토 입은 여자는 성모님이란 확신도 들었다.

두 분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한 것도 없는데 수호천사처럼 내 주위에 계셨다 생각하니 흥감해 눈물이 주르륵 났다.

채정순(아녜스·대구 두산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