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너는 그것이 나보다 더 소중하냐? / 박정순

박정순(루치아) 소설가
입력일 2021-06-29 수정일 2021-06-29 발행일 2021-07-04 제 325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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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일반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창조이야기나 부활 등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는 장면들이다. 아담은 죄를 짓고 하느님이 찾으시는 소리에 숨어서 잘못을 실토한다. 아!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하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단 창세기는 설화적인 요소가 다분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 이야기도 대충 그러한 요소가 가미된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다신종교를 믿던 그가 네 고향을 떠나라는 소리에 어떻게 하느님의 소린 줄 알고 바로 길을 떠났을까? 늘그막에 주신 동물도 아닌 외아들을 무슨 변덕이 났는지 제물로 바치라는데, 잔인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 한마디 항변도 의문도 없이 어찌 그리 순명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약은 역사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너무나 담담히 그려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물론 모세는 예외지만 하느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데 말씀으로 인간과 직접 대화를 하신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느님께서 세 번이나 부르도록 스승의 부름으로 들은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러 가던 길에 만난 예수님의 모습도 확실하진 않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답한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환청이나 청각적 심상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이 완전히 변해 열두 제자보다도 더 열성스러운 제자가 된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비현실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나름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신비한 일은 성경 속 인물이나 어떤 특정 인물에게만 일어날법한 일이었다. 간혹 하느님 말씀을 듣고 대화한다는 신자들을 보면 열심한 척 과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절망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 결혼을 결심했다. 어떤 조건이든 상관이 없었다. 남편의 많은 경험들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허나 농사를 짓는 시부모와 시동생 조카까지 거느리고 살아야하는 나는 완전히 밥순이가 되고 말았다. 육체의 고달픔을 안고 누우면 이십여 년간 공들여 쌓아온 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 같아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그래도 나는 가정에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내 소망은 하느님께 부탁하고 몇십 년 동안 간절히 기도했으나 하느님은 감감소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나는 여전히 화살기도를 간절히 하고 있었다. 갑자기 “너는 그것이 나보다 더 소중하냐?” 하는 우렁찬 소리가 바로 앞에서 분명히 들려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범할 수 없이 엄중하면서도 따스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속에서도 좀 억울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거는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이 제일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너무 집착해서 그분이 밀렸다는 것을 모른 모양이다. 하느님은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면 됐다”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그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오직 하느님 일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늦게나마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하느님은 우리와 직접 대화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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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순(루치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