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수녀님이 차려주는 청소년 무료식당 ‘서울 인보의 집’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6-22 수정일 2021-06-23 발행일 2021-06-27 제 3251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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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배고프면 언제든지 따뜻한 집밥 먹으러 오렴” 
청소년들 입맛에 맞는 메뉴 마련해 
배식하지 않고 직접 주문받아 조리
24살 이하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
굶는 아이들은 어느 곳에나 있어
부담 느끼지 않고 찾아올 수 있게 사생활 묻지 않고 담백한 대화만

“얘들아~! 밥먹자!”

서울역에서 걸어서 10여 분. 후암시장 입구에서 100m가량 골목으로 들어가니 알록달록한 입간판이 반긴다. 어린 시절 자주 듣던 익숙한 말이라 그런지, 건물이 일반 주택이어서 그런지, 마치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다. 입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니 음식 냄새가 가득하다. 수녀들이 음식도 하고 서빙도 하는 식당, 바로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식당, 지난 5월 문을 연 서울 인보의 집(서울 용산구 후암로23길 16)이다.

서울 인보의 집 원장 홍미라 수녀는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다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며 “이곳을 통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홍 수녀가 서울 인보의 집에서 음식을 내고 있다.

■ 청소년에게 선물하는 맛있는 밥

“오므라이스 주세요!”

“저는 김볶(김치볶음밥)이요~.”

주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홍미라 수녀(서울 인보의 집 원장·인보성체수도회)의 손이 바빠진다. 방금 들어온 두 가지 주문에 라면도 추가됐지만, 홍 수녀의 손길엔 거침이 없다. 웍으로 재료를 볶는 모습에서는 경쾌함마저 느껴진다. 함께 준비하는 김정환 수녀도 홍 수녀와 보조를 맞춰 어느 틈엔가 뚝딱 음식을 만들어 냈다.

무료식당이라 하면 한솥 가득한 밥에 국, 반찬들을 식판에 담아주는 모습이 떠오르기 십상이지만, 서울 인보의 집에는 배식대가 없다. 대신 원하는 메뉴를 골라 주문한다. 오므라이스, 김치볶음밥, 불고기덮밥, 라면에 공기밥까지. 김치볶음밥에는 날치알 추가 선택지도 있고, 라면도 매운 라면에서부터 짜장라면까지 원하는 종류를 고를 수 있다.

메뉴 선정은 청소년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가며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이 배고플세라 음식의 양을 많이 했지만, 요즘 청소년들이 주식을 많이 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간식도 따로 준비한다. 빙수, 떡볶이에서부터 퓨전음식까지 간식도 청소년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고민해서 준비하고 있다. 수녀들은 메뉴 고민이 늘었지만, 새로운 간식 메뉴 만드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SNS에 올리는 등 오히려 소통의 기회로 삼았다.

메뉴도 많고 주문을 받고 나서 조리해야하니 일반 무료식당보다 손이 많이 가는 것이 당연지사다. 원하는 만큼 덜어먹을 수 있도록 준비된 김치나 밑반찬도 수녀들이 직접 만든다. 식재료도 좋은 것을 쓰기 위해 수녀들이 새벽에 시장을 돌며 마련하고 있다. 메뉴를 줄이거나 통일하면 일이 줄어들겠지만, 수녀들은 굳이 고된 일을 자처한다. 이유는 하나다. 이곳을 찾는 청소년이 맛있는 밥을 먹었으면 해서다.

서울 인보의 집을 찾은 은혜(10·가명)양은 “수녀님들이 해주신 밥이 너무 맛있다”며 “맛있는 밥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서울 인보의 집에서 김정환 수녀가 청소년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도직 현장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수녀들도 상담을 공부한 사회복지사들이다. 수녀들이 청소년들의 고충도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법도 하지만, 정말 수녀들은 밥만 주고, 청소년들은 밥만 먹었다. 대화가 있다고 해도 “뭐 먹을래?”, “더 먹을래?”, “또 와” 정도다. 홍 수녀에게 물으니 “아이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아이들의 사생활을 묻지 않고 있다”며 웃었다. 청소년들이 마음 편하게 따듯한 밥 한 끼 먹고 힘을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이었다.

서울 인보의 집에선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규정한 청소년, 즉 만 9~24세라면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다. 청소년이라고는 하지만 중·고등학생에 국한하지 않고 어린이부터 비교적 젊은 청년층까지도 이용할 수 있다.

인보성체수도회가 청소년을 위한 식당을 마련하고자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부터다. 수녀들은 수도회 정기총회에서 이 시대의 요청을 성찰하면서 청소년 문제를, 그리고 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가정폭력, 가출 등 위기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생각했지만, 준비를 하면서 오늘날 청소년들의 모습을 만나다보니 ‘밥을 먹지 못하는 청소년’은 어디에나 있었다. 부모가 있고 없고나 집안의 경제력에 관계없이 다양한 이유로 마음 편하게 밥 한 그릇 먹기가 어려운 청소년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밥을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밥 한 그릇을 전하고 싶었다.

홍 수녀는 “지금 시대의 아이들을 다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며 “벤츠를 타고 오든 걸어오든 청소년은 청소년이고, 이곳은 모든 청소년에게 열린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곳을 통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인보의 집 입구에는 ‘얘들아~! 밥먹자!’ 라는 문구가 적힌 배너를 항상 세워두고 있다.

수녀들이 방문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준비한 핸드크림, 학용품 등의 선물들이 담겨 있다.

청소년들의 의견을 모아 선정한 메뉴 중 하나인 ‘돈불고기 덮밥’.

■ 이웃의 정(情)으로 이어지는 식탁

서울 인보의 집은 지난 5월부터 매주 수·목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운영하고 있지만, 이곳을 찾는 청소년들의 수는 아직 적다. 청소년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 아닌데다 식당 문을 열 당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근 학교들이 휴교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방문한 청소년이 단 한 명도 없던 날도 있다.

밥이 고스란히 남아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수녀들은 “음식이 많으면 이웃에 나누면 되니 걱정 말라”며 웃었다. 와서 식사하는 청소년이 없더라도 밥과 식재료는 도시락으로 만들어 소외되고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보낸다.

서울 인보의 집은 원래 쪽방촌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쪽방촌 가까이에 자리 잡았다. 지금도 화·금요일은 쪽방촌에 도시락을 전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쪽방촌 구석구석을 다니며 그들의 이웃이 돼주다 보니 인연이 인연을 물고 이어져 마을 곳곳의 사정을 알게 됐다. 수녀들은 부모의 맞벌이로 홀로 끼니를 챙기고 있는 이웃 청소년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돕고, 마련한 도시락이 이웃 청소년들의 수보다도 많으면 이웃에 거주하는 장애인, 소외된 어르신과 다문화 가정에도 음식을 나눈다. 청소년들을 위한 식탁이 식사를 챙기기 어려운 이웃들의 식탁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수녀들은 이렇게 이웃과 음식을 나누면서 또 그 주변 청소년들에게 이 집을 알려주길 부탁하고 있다.

홍 수녀는 “지금은 찾아오는 청소년이 적지만 언제가 청소년들로 북적거려서 지금을 기억하며 ‘그렇게 한가한 날도 있었지’라고 회상하는 날을 꿈꾼다”면서 “서울 인보의 집이 청소년들이 배고프고 힘들고 어려울 때 떠오르는 편안한 집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의 02-793-9178 서울 인보의 집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