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미국 주교회의, 낙태 지지 정치인 영성체 거부 문건 작성 추진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1-06-22 수정일 2021-06-22 발행일 2021-06-27 제 3251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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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합의성’ 토대로 신중히 접근해야
주교단 75%가 찬성했지만 교리·사목적 문제 얽혀있어 다수결로만 결정할 수 없어
겸허한 대화와 설득 필요

미국 주교회의가 6월 16~18일 열린 춘계 정기총회 기간 중 표결을 통해 낙태 지지 정치인의 영성체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문서 작성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168, 반대 55, 기권 6표로, 75%의 주교들이 문건 작성에 찬성했다. 문건은 작성된 뒤 11월에 열리는 추계 정기총회에서 재차 표결에 부쳐진다. 발표에 앞서 교황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문건이 작성돼도 모든 교구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법적 효과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 주교단의 움직임은 신중한 접근을 요구한 교황청의 의사에 반한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루이스 라다리아 추기경은 지난 5월 미국 주교회의 의장 호세 고메즈 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낙태 지지 정치인에 대한 영성체 금지는 중대한 문제로 더 많은 ‘광범위하고 건전한 대화’가 요구된다며 신중한 접근을 요구했다.

낙태 지지는 교리와 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낙태를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단죄 자체에 논란의 여지는 없다. 다만 정치인을 포함한 낙태 지지자에 대해 성찬례 참례를 일률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교리적·사목적·윤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는 논란이다

미국 주교들은 바이든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고 지난 7개월 동안 미국교회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했다. 교황청이 신중한 접근을 요청한 뒤, 주교 70여 명은 고메즈 대주교에게 문서 작성 추진을 유보해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하지만 미국 주교회의는 영성체 금지 문건 작성 여부를 총회 안건에 포함시켰다.

교황청은 왜 신중한 입장인가? 한 가지 이유는 이는 중대한 사안으로 주교단의 한층 강화된 일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 의사 결정이 다수결로만 해결될 수 없다.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역시 신앙과 교리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나 주교단의 일치가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교황청의 승인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 주교단 문건이 다른 나라 교회에 미칠 영향이다. 유럽에서 낙태는 더 이상 정치적 이슈가 아니다. 남미에서도 낙태 지지 운동이 점점 강세를 띠고 있다. 유럽과 남미에서 낙태 지지 정치인들에 대한 영성체 금지는 미국에서와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다. 같은 문제를 다른 대륙에서 다르게 적용할 수는 없다. 이는 교리적 문제인 동시에 사목적 문제인 것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실용적인 과제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영성체 거부는 기후위기나 코로나19에 대한 대응, 인신 매매, 종교 자유, 난민과 경제 개발 등 다른 사회적 이슈들과 관련된 미국 정부와의 협력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원리원칙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실용적인 과제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일부 교황청 전문가들은 교황청이 현재 미국 주교회의가 추진하고 있는 낙태 지지 정치인에 대한 영성체 금지 문건 작성과 발표에 당분간 어느 정도 애매한 위치에 서 있고자 한다고 분석한다. 영성체 금지를 선언하는 것도, 낙태 지지 정치인의 영성체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도 현재 상황에서는 모두 어렵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개입’은 이 두 가지 판단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교황은 이 부분에서도 ‘공동합의성’의 발휘를 기대하고 있다. 교황청은 미국 주교회의가 영성체 금지 문건을 추진하기에 앞서 좀 더 신중하고 겸허한 대화, 설득과 이해의 과정을 거치길 기대하고 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