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무고한 이들이 왜 고난을? / 김형태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1-06-15 수정일 2021-06-15 발행일 2021-06-20 제 325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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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창밖 컴컴한 불암산 숲속에서 소쩍새가 울었습니다. ‘소쩍, 소쩍, 소쩍’ 달빛도 창을 넘어 들어와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내 머리맡을 환히 비춥니다. 침대 두 개와 화장실이 전부인 비좁은 방 내 반대편에는 생면부지 사람이 열 때문에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선잠에 들어 있습니다. 나도 별 증상은 없었지만 격리돼 있어야 하는 처지. 옛날 태릉선수촌 숙소에 갇혀 있으면서 너무 답답해서 2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저 소쩍새 우는 숲속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오전 7시, 11시, 오후 5시에 문밖에 놓고 가는 세끼 밥을 돼지처럼 받아먹으며 하릴없이 창밖 숲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10여 일 만에 세상에 나오니 왕릉 소나무 길을 걷는데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두어 시간여, 태릉을 거쳐 중랑천변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잠시나마 선수촌 방에서 같이 지냈던 이들의 평소 고단한 삶의 모습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릿했습니다. 첫 번째 방 동료는 열이 계속 나서 4일 만에 병원으로 갔고 다음 사람은 코골이가 너무 심해 독방으로 옮겨 갔고 세 번째 온 이는 내가 먼저 나가는 걸 못내 아쉬워하더군요. 그들을 통해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다들 옆 사람 배려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래서 세상이 이리 복잡하고 힘들어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모양입니다.

걷는 내내 이런 원망도 들더군요. ‘아니, 나는 식당이고 어디고 사람들 많이 모이는 데는 절대 안 가고, 명절이며 노모 생신 등 가족 모임도 다 미루고, 꼭 필요한 회의는 비대면 화상으로 하고, 1년 넘게 집과 사무실, 주말 산행이 전부였는데 어찌 이런 생고생을 했노. 망신스럽게.’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겨우 열흘 남짓 ‘옥살이’가 이리 힘들었는데 억울하게 화성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감옥에서 30년 세월을 어찌 보냈을까. 내가 변론했던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도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동네 뒷산에 끌려가서 영문도 모른 채 처형당한 수많은 필부필부들이며, 무고하게 사형을 당한 8명의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며, 누명을 쓰고 수십 년을 옥에서 보낸 수많은 이들은 어떻게 그 고통을 견뎌냈을까.

이제 한 달여가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이런 의문에 대학시절 열심히 읽었던 구약성경 욥기를 다시 펼쳐 읽었습니다. 욥은 의인이고 부자고 가정도 축복을 받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식들 다 잃고 그 많던 재산도 사라지고 자신은 고약한 부스럼병에 걸려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지요. 성경에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려고 하느님과 내기를 했다고 돼 있지만 어디 하느님께서 그런 내기를 하실 리 있겠나요. 욥기를 쓴 이의 ‘문학적 꾸밈’이겠지요.

욥의 친구들은 네가 죄가 많아서 그런 거라고 심판을 해 대고, 욥은 자신이 무고한데 하느님은 왜 이러시는 거냐고 차라리 죽고 싶다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그때 나이 어린 엘리후가 나타나 네 사람 모두를 꾸짖습니다. “당신들이 죄가 있네, 없네 하며 제 주장을 해 대지만,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정의가 넘치시는 분이요, 온 세상의 주재자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번, 두 번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라고 깨우쳐 줍니다. 그 뒤 욥은 폭풍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라고 자복합니다. 개체에 불과한 처지에 감히 전체이신 당신에 맞서 내가 의롭네, 아니네 하고 따지던 자신의 주제를 그제서야 파악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욥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욥의 입을 다물게 했던 그 큰 신비란 바로 개체의 자기주장을 접고 다른 개체와 전체이신 하느님을 향해 가는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고한 이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몸소 보여 주신 게지요.

‘스스로 지혜롭다며 이것저것 재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사랑을 해라.’ 이것이 내가 태릉과 천변 길을 걸으며 저 욥처럼 품었던 불평과 의문의 최종 답이라고 나는 알아 모시게 됐습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